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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인간관계(人間關係) (2)
2017/08/07 14:0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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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생활의 아름다움이란 관계개념의 바른 정립에서 온다. 은퇴를 하고 난 후 인간관계를 생각하는 시간이 새삼 깊어진다. 흔히들 말하는 “믿을 사람 없다”는 말은 내 삶에 가장 듣기 거북한 말이었다. 사람이, 그것도 목사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영적 지도를 하며 그런 자를 어찌 목회자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내 삶의 맥이며 목회의 기본 틀이었다. 사람을 신뢰하는 것, 그것은 일찍 예수님을 영접하고 목회자로 소명 받은 후 서원한 대로 내 삶의 여정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의식적으로, 내 입으로 원망하고 불평하며 남의 말을 나쁘게 하거나 비판하며 정죄하는 일은 없었다. 그 자체가 불신앙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씀대로 가르치며 설교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는 기본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때로는 ‘너’로 말미암아 어불성설의 일을 겪으면서도 나는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언제나 이해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았다. 내가 듣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야 어쩌랴마는 적어도 내가 아는 ‘너’와 나의 관계에서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비판하는 경우는 겪지 않으며 행복한 목회를 마무리했다. 그야말로 평행감축(평안, 행복, 감사, 축복)의 목회사역이었다.
그런데 은퇴 후에 나는 꿈에라도 겪고 싶지 않은 기막힌 일을 겪으면서 인간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한다며 견줄 데 없는 아름다운 관계로 더불어 살아왔던 사람들이 어느 날 돌변하여 낯빛을 바꾸고,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모를 주며 그야말로 사악한, 거짓되고 위증하는 숱한 일을 겪으면서 ‘왜?’라는 질문 속에 좌절했다. 몇 달 동안은 스스로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다. 그러나 영안을 열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다시 당신을 옷 입으며 새 힘으로 일어서게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새로운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원망과 미움이라는 사단의 책략에 흔들리지 않고 목사로서의 걸음을 걷는다. 이런 감사 속에 더욱 감사한 것은 이제야 예수님의 골고다로 오르신 걸음이 문자가 아닌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진솔하게 묵상된다는 것이다. 온갖 수치를 다 당하시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으시고 마지막까지도 십자가에서 용서와 축복의 메시지를 남기신 이치를 무릎을 꺾고 엎디어 묵상하게 된다. 그렇게 걸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그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보여주신 주님의 가르침을 흉내라도 낼 수 있어야 평생 강단에서 설교한 목사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걸어야 할 길이 또한 나의 길이 아니겠는가? 이런 시간 속에 나는 다시금 ‘인간관계’를 생각해 본다. 나는 그 누군가 ‘너’에게, 또 나에게 행하는 그 ‘너’와 같은 나는 아닌가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스린다.
가난했기에 가난한 너를 돌보았고, 아팠기에 아픈 너에게 다가가 안아주었으며, 헐벗었었기에 헐벗은 너에게 내 옷 한 벌을 입혔고, 지쳐 쓰러졌었기에 쓰러진 너에게 달려가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 ‘너’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너였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너’가 오늘의 예수님이라는 것을 마태복음 25:40절에서 주님이 가르치셨기에,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나를 너에게 줄 수 있는 삶으로 예수님의 흉내라도 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살았다.
때론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 ‘너’가 왜 나를 이토록 아프게 하고 고통하게 하며 지쳐 일어서지 못하도록 짓밟는가? 내가 언제 너를 아프게 한 일이 있었던가? 내가 언제 너를 힘들게 한 일이 있었던가? 내가 언제 너를 고통하게 한 일이 있었던가? 오히려 나는 너를 사랑한 것뿐인데...’
수없이 ‘왜?’라는 반문과 눈물로 엎드려서 하늘을 향해 목이 메도록 부르짖는 격랑 가운데 주님께서 조용히 다가와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위해 내 목숨까지 주었는데 그 ‘너’는 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단다.” 이 한 마디 말씀에 나는 오늘도 유구무언이 되어 주님 가신 길을 걷는다.
 
어느 날 내 품에서 장성하여 떠난 아들 같은 목사 내외가 찾아왔다. 두 자녀를 데리고 현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입을 실룩거리며 응접실로 와서는 네 식구가 큰 절을 했다. 두 아이는 일어서서 있는데 목사 내외는 그대로 엎드려 울고 있었다. 그 곁에 어린 사모도 소리 없이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일어서거라.” 하는 순간 터진 울음소리는 내 귀가 아닌 심장에 못처럼 박혔다. “목사님이 계셨기에 오늘 제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무너지면 저희들도 무너집니다.” 많은 후배들 가운데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그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음을 나는 느낀다. 그러나 ‘참 많이 사랑했구나...’ 싶은 곁에 머물렀던 후배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관계’다.
필요에 따라 너와 나의 관계가 맺어질 때면 온갖 미사여구를 입술에 올리다가 필요치 않을 때는 그 관계의 소원함뿐 아니라 과장된 거짓 언행을 하고, 감사는 고사하고 죽이려 드는 것이 인간관계라면 그것이 어찌 ‘인간관계’겠는가. 오히려 짐승만도 못한 관계가 아니겠는가? 소위 미물(微物)도 은혜를 알고 갚는다 했고, 짐승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물지 않는다 했다. 그런데 인간이 되어서 미물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짐승만도 못해서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어찌 그런 참담한 인간관계를 엮을 수 있는가.
‘신자’는 ‘믿는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용법일 때는 믿는 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가 신자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제자’란 헬라어 ‘마데테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배우다’라는 뜻의 ‘만다노’에서 유래된 ‘배우는 사람’ ‘지성적으로 따르고 모방하는 자’라는 뜻이다. 제자가 무엇인가? 선생이 있을 때 제자도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선생’이란 “이렇게 하라”는 말만으로 선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선생이란 선견(先見)하고, 선지(先知)하며, 선행(先行)할 때 따르는 제자의 선생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이에 대하여 명백하게 말씀 하셨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그렇다.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주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우리는 어떤 선생인가? 또한 어떤 제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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