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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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은 제중원 원장으로 제중원을 선교병원으로 개편하고 한국에서의 의료 및 교육, 혹은 의학교육을 실행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42년간 체류했던 그는 1893년 내한하여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광혜원(제중원)의 의사로 선교사역을 시작했는데, 이 병원을 모체로 의학교육을 실행하게 된다. 제중원에서 의학교육은 1886년 3월 29일 제중원의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1904년 9월 세브란스 씨의 후원으로 새로운 병원건물을 신축하게 되자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으로 개칭되었고, 제중원의학교는 자연스럽게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개칭된다. 1908년 6월에는 첫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이들이 우리나라 정부, 곧 대한제국이 의사면허를 준 첫 의사들이었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후일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개칭된다.
그런데 제중원 의학교에서 물리(物理)를 가르친 바 있는 언더우드는 1915년 3월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를 설립하고 자신은 교장에 에비슨은 부교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언더우드가 1916년 10월 12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에비슨은 이 학교 교장이 된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17년 4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설립과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인가받게 된다. 그리고 언더우드의 형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의 후원으로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134번지 일대 송림이 울창한 29만 320평을 매입하였는데, 지금의 연세대학교 부지가 된 것이다. 언더우드의 형 존은 ‘언더우드 타자기’ 창업자이자 실업인이었다.
에비슨는 세브란스와 연희 두 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양 학교의 합동을 생각했으나 이 일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루어지게 된다. 즉 양 학교는 6.25 전쟁 후 복구과정에서 합동을 결의하고 연희의 ‘연’자와 세브란스의 ‘세’를 조합하여 1957년 1월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이 일을 보지 못한 채 에비슨은 1956년 8월 사망했다. 물론 에비슨은 이보다 앞서 1934년 세브란스의전 교장직에서 물러났고, 1935년 12월 은퇴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타계한 것이다. 그는 진정한 의사이자 의학교육가였고 대학교육자였다. 그는 김명선 김필순 홍석후 홍종은 등 의사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백낙준 백남운 유억겸 이관용 이원철 이춘호 정인보 조병욱 최현배 등 당대 최고의 인재를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하여 한국에서의 대학 교육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런데 토론토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은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한국선교를 자원하였고, 임신한 부인 제니와 3아이, 장남 로렌스(Lawrence, 1887-1962), 장녀 레라(Lera, 1889-1969), 차남 고든(Gordon, 1891-1967)를 데리고 1893년 4월 조선으로 향하는 장도에 올랐다. 즉 토론토를 떠나 밴쿠버를 거쳐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6주를 지낸 후 다시 승선하여 고베로 갔다 거기서 작은 증기선 히고마루(Higo Maru, 肥後丸)을 갈아타고 나가시끼를 거쳐 대한해협을 지나 부산으로 상륙했다. 에비슨은 이날 부산의 광경을 이렇게 기술했다.
 
“우리는 마치 키가 큰 파수꾼처럼 바위기둥들이 양쪽에서 지키고 서 있는 해협을 통과해 들어갔다. ... 곧 바로 넓은 항구가 한 눈에 들어왔는데 크고 높은 산들이 배경을 이루고, 폭이 좁고 긴 저지대의 땅은 해변을 따라 늘어져 있었다. 이곳 부산 촌락은 해안을 따라 퍼져 있으며 일본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으로, 적어도 그 시기는 14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수의 작은 초가집들이 좁고 긴 육지를 따라 마을에 모여 있었다. 높은 언덕과 더 높은 산들은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이 없고 벌목도 하지 않고 경작되지 않는 상태로 뒤편에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근사한 전경은 아니었다. 드디어 언덕 위에 보이는 작은 서양식 단층집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바로 우리가 찾고 있던 집이었다. 가족은 배에 남겨두고 거룻배를 타고 해안으로 가서 울퉁불퉁하고 구부러진 길을 따라 그 집까지 갔다. 그 때가 1893년 6월 16일 주일 오후였다.”
 
에비슨이 영선현에 위치한 베어드 집에 도착했을 때, 외국인들이 그곳에 모여 예배드리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베어드 목사 부부, 휴 브라운 의사 부부, 선교회 사람들, 그리고 2-3마일 떨어져 사는 호주장로교선교사들이었다. 이때의 모습이 매우 쓸쓸해 보였다고 에비슨은 기록하고 있다. 배가 몇 일 부산에 체류했으므로 다음날 에비슨은 아내와 아이들을 베어드 집으로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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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7] 에비슨이 본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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