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7.09.21 15:21 |
[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6] 베어드(W. M. Baird)의 눈에 비친 부산
2017/04/28 18:27 입력
트위터로 기사전송 페이스북으로 기사전송 구글+로 기사전송 C로그로 기사전송
이상규교수 copy.jpg
 부산에 온 첫 북장로교 선교사는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였다. 1888년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1890년 6월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1890년 11월 18일 애니 아담스(Annie L. Adams, 1864-1916)와 결혼했다. 결혼 한 달 후인 12월 8일 베어드 부부는 태평양을 항해하는 우편선 더 차이나(The China)호로 호놀룰루,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고베에 도착했고, 여기서 오와리 마루(Owari Maru)호로 1월 25일 고배를 출발하여 나가사키를 지나 1891년 1월 29일 부산항으로 입국했다. 겨울비가 내리는 음산한 날이었다. 이날 부산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겨울이어서 모든 것이 황량하게 보였다. 언덕 넘어에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다른 인종처럼 보였다. 소리치는 부두노동자들은 마치 우리를 조각 조각 찢어버리려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곳의 작은 집들은 짚단 더미처럼 보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동일하게 지으시고’(시33:15)라는 말과 같이 외면은 차갑게 느껴졌지만 후에 안 일이지난 이면에는 인정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다정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어드가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한 날은 2월 1일 주일저녁이었는데 마중 나온 마펫(S. A. Moffett)의 안내로 서울에 도착한 날은 2월 2일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매코믹 신학교 동창인 미혼 선교사 마펫 집에 체류하면서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베어드는 서울 도착 다음 날부터(2.3-7) 모인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연례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기 개설한 서울 선교부(Seoul Station)에 이어 조선의 다른 두 곳, 곧 평양과 부산지부를 개척하기로 하고 평양에는 마펫을, 부산에는 베어드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베어드는 공식적으로 부산지부 개척자로 임명된 것이다. 그래서 베어드는 부산 선교부지 확보를 위해 언더우드와 한국인 어학 선생 이씨(Mr Yi)와 함께 부산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날이 1891년 2월 25일이었다. 이들은 부산에 2주간 체류하며 선교부지를 확보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상경하였다. 부산지부 개척이 지체되던 중 그해 9월 주한미국영사관 관리(Mr Augustine Heard)의 도움으로 9월 24일 영선현의 두 필지 땅을 매입하게 되는데, 이곳이 현재의 영주동 코모도 호텔과 그 주변이었다.
베어드는 1891년 9월 초 부산으로 이주하였고, 매입한 부지에 선교관 건축을 시작했는데, 1892년 1월 13일에는 지붕을 얹는 작업을, 2월 5일에는 선교관 지붕에 기와를 얹었고, 4월 15일에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집으로 베어드 부부가 이사했다. 선교관이 완성된 때는 그해 5월 말 혹은 6월 초였다. 이 건물이 세관건물에 이어 부산에 세워진 두 번째 서양식 건물이었다. 이 집이 부산을 거쳐 가는 모든 선교사들의 임시 거주지 역할을 했다. 약 한달 후인 7월 5일 베어드의 첫 아기 낸시 로즈(Nancy Rose)가 태어났으나 2년 후인 1894년 5월 13일 뇌척수막염으로 사망하여 복병산(伏兵山)에 묻혔다. 29세의 나이로 내한한 그는 33세가 되는 1895년까지 만4년 간 부산에서 일하고 대구지부로 이동하였고, 후에는 서울지부를 거쳐 평양으로 이거하게 되는데, 부산에 대한 그의 첫 인상은 흥미로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부산에는 일본인 거주자가 많아 왜색(倭色) 짙은 도시로 인식했는데, 부산항에서 처음 보는 부산과 부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언덕은 높고 황량하게 보인다. 일군의 사람들이 언덕을 넘어 소가 다니는 길로 걸어가는 것이 보이는데, 모두 흰옷을 입고 있다. 유령같이 보이기도 하고, 밤에 입는 옷을 입고 낮에 퍼레이드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당시 부산에는 항구쪽에 일본인 5000명이 사는 식민지라는 말이 있었다. 해안을 따라 3마일 쭘 가면 옛 성으로 쌓인 부산(부산진)이 나온다. 내가 도착했을 당시 외국인의 입장이 허락되었으나 내가 도착하기 몇 달 전에는 한 중국인이 못 들어 오게 면전에서 성문을 닫아버렸다는 사실은 후에 듣게 되었다. 조선은 은둔국에서 이제 막 깨어나고 있다.”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kcnp1@hanmail.net
한국기독신문(www.kcnp.com) - copyright ⓒ 한국기독신문.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 많이본기사
  • 화제의 뉴스

화제의 포토

화제의 포토더보기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정기구독신청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 한국기독신문 (http://www.kcnp.com) | 창간일 : 1995년 4월 11일 | 발행인 : 김해옥 | 편집인 : 신이건 | 청소년보호 책임자 : 신상준 국장 
    602-053   부산광역시 서구 까치고개로 229번길 47-1
    사업자등록번호 : 758-96-00228 | 정기간행물등록 : 부산, 아00259
    대표전화 : 051-245-1235 | 팩스 : 051-245-2763 | kcnp1@hanmail.net
    Copyright 2015. kcnp.com All right reserved.
    한국기독신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