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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6 - 부활
2017/04/28 18:2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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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부활
1.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문화.jpg▲ 화형당하는 아투에이 추장
 
500여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 하나. 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인 에스파뇰라 섬의 타이노(Taino) 부족의 아투에이(Hatuey) 추장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섬에 쳐들어오자 부족 사람들을 결집시켜 용맹스러운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잘 훈련된 스페인 군인들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의 부족은 전멸했고 아투에이는 수백 명의 남은 타이노 부족 사람들과 함께 쿠바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스페인 정복자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고 1512년 2월 2일 결국 그는 사로잡혀 화형을 당하게 된다.
이투에이 추장은 부족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내 손의 금은보화, 이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그들의 신입니다. 이것들을 위해 그들은 전쟁을 벌이고 우리를 죽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탄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물리치고 바다에 처넣어야 합니다. 멀리서 온 이 야만족들은 자신들이 평화와 평등의 신을 믿는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땅을 강제로 빼앗습니다. 우리를 그들의 노예로 삼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영혼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신의 상급과 징벌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소유물을 강탈하고 훔쳐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내와 딸을 강간하고 죽입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월등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의 무기로써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강철로 만든 갑옷으로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아투에이 추장의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 스페인 가톨릭의 종군 신부는 이렇게 물었다.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천국으로 갈 것이냐?” 그러자 아투에이 추장이 물었다. “여기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는 나의 가족을 겁탈하고 그리고 나의 온 재산을 빼앗고 가축들을 탈취해 간 이 군인들도 천국을 가는가?” 신부는 “당연히 이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천국에 간다.” 그러자 아투에이가 즉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다. 이들이 없는 지옥이 바로 천국이다.”라고 하며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후 이 지역을 향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본격적인 정복전쟁은 1500~1650년 까지 150년에 걸쳐 완료됐다. 이 기간 동안 중남미 대륙의 토착민은 6,500만 명이었으며 정복전쟁 이후는 500만 명 이었다. 약 6,0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2. 고난과 부활
‘하나님의 이름을 정의’로 규정하는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오늘날 우리의 문명은 능력의 원칙과 향유의 원칙하에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고통과 죽음을 개인화시키고 공공의 사회로부터 추방시켜 버렸다.”라고 한다. 이 말을 이 땅 대한민국의 지난 9년에 적용시켜보면,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 자행되는 온갖 구조적 불의에 대한 종교적 발언과 비판은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어 공적 차원에 반영되지 못한 채(지난 3년간 세월호에 대한 함구를 보라), 국가권력의 구조적 폭력은 합법성과 정당성으로 합리화 되었으며(세월호에 관한 언론과 정치의 행태를 보라), 이에 대한 저항과 항거는 불법적이고 위법적인 차별과 함께 반정부적이고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한 행동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따라서 지금 불의한 정치에 합법성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이들과 신앙을 개인화 하는 사제들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자본과 권력의 ‘능력의 원칙’과 ‘향유의 원칙’에서 배제된 이름 없는 하나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모두 죽음, 혹은 죽임에 관계가 된다. 정신분석학의 명제에 의하면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한다. 한번은 생명체로서 죽고, 또 한 번은 상징적으로 죽는다. 한 사람의 죽음이 사회적 상징체계 안에서 적합한 자리에 안착하는 것을 상징적 죽음이라고 하는데, 따라서 충분한 애도와 장례의 절차를 통해 죽은 자에 대한 타당한 의미 부여를 한 이후에, 산 자들은 죽은 자를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적 생명체가 먼저 죽고 상징적인 죽음이 뒤따른다. 한 사람이 죽은 후 그 장례 절차를 통해 우리는 육신적인 죽음과 상징적인 죽음의 순서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적인 죽음이 먼저 있고 생명체가 나중에 죽는 죽음도 있다(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우리 사회에 ‘박정희 체제’가 해체되는 상징적인 죽음이 그러하다). 반면 생명체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으나, 상징적으로 죽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부활의 경우를 통해 지속성을 획득한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부활사상은 바벨론 포로기 말기에 이르러 생성이 되었다. 물론 페르시아나 바벨론, 그리스 등의 주변 종교들의 영혼불멸이나 윤회 같은 영향이 있었겠지만, 유대교는 부활을 ‘메시아적 기대’라는 틀로 ‘기억 투쟁’과 연결시킨다. 전 감신대 교수였던 이정배 교수에 의하면 ‘자신들의 역사를 빼앗겨 잊혀진 존재들을 새롭게 역사의 주체로 불러내는 것, 메시아를 통한 정치적 사건, 이것이 유대교의 부활 이해’이다. 힘들고 어려운, 또한 고통스러운 바벨론 포로기를 살면서 정치적 독립과 종교의 자유, 해방을 위해 힘껏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이들의 죽음에 대한 선한 보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부활 사상으로 확장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 속을 살면서 세상 밖을 꿈꿨기에 고난당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런 체제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거듭 이야기하는 것이 유대교의 부활의 의미이다.

3. 영혼 불멸과 몸의 부활
그러나 기독교, 혹은 개신교로 오게 되면 팔레스틴 유대교의 지평이 헬레니즘 철학의 지평과 만나 조금 더 새로운 개념으로 확장이 된다.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는 인간 존재의 종극적 운명(혹은 사후의 운명)에 관해 ‘영혼 불멸’과 ‘몸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상징이 있다고 말하며 “전자는 그리스적인 상징이고, 후자는 히브리적인 상징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두 가지를 아울러 가졌다. 영혼 불멸의 상징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때그때 단독적으로 불멸의 영으로 되지만, 몸의 부활의 상징에 의하면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부활한다.”라고 말한다(이하 서남동, 「우리의 부활과 4월 혁명」 참조). 인간 개인의 운명에 대한 개인적 상징과 인간존재의 사회적 운명에 관한 사회적 상징의 대조이다.
서남동 교수는 사후의 ‘불멸의 영혼’은 영원한, 말하자면 신국에 개인적으로 입장하게 되는데, ‘부활’의 경우에는 역사적인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 단체로 입장하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연결되는 부활이라고 한다. 유대교의 부활의 맥락에 공동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사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타계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의 미래에 지금 억눌린 자들이 상속 받고 그 주인공이 될 약속의 새 시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적 풍토에 들어가 순수이념(이데아)의 초월계와 비실재적인 그림자의 현실계라는 이층구조 속에 편입되었으며 로마 콘스탄틴의 왕권 종교가 되면서 기독교의 신국은 타계적인 피안이 되었다. 따라서 시간적 미래와 역사적 지평을 자신의 삶의 자리로 삼고 있는 히브리적 전통을 상실하고 말았다.
서남동 교수는 “역사적 기독교는 두 가지 상징(그리스적이고 히브리적인 상징)을 아울러 물려받았다. 개인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신앙, 곧 개인 영혼의 절대적 가치가 보장되는 상징과 이 사회가 낡아지면서 새 사회가 와야 한다는 사회 갱신에 대한 보장이 병립공존(竝立共存)되어서 상호 견제되는 것이 불가피하기도 하고 바람직하다. 신국 상징이 메시아 왕국 상징에 의해 삼켜진다면, 사회개혁을 위해서 개인 영혼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생각과 결말이 나올 것이고, 메시아 왕국 상징이 신국 상징에 의해서 삼켜져 버린다면, 지상 역사의 미래와는 상관이 없는 타계적 신앙이 되고 말 것이다. 양자택일이 얼마나 잘못된 길이라는 것, 그리고 기독교도 아니라는 것에 관해서는 다시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의 경우 메시아 왕국 상징이 신국 상징 속에 먹혀버렸다. 사실, 지배자와 가진 자들은 천년왕국,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원하지 않고 도리어 무서워한다. 그것은 자기네들의 소유와 지위에 대한 위협과 그 전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눌린 자, 가난한 자들에게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가 절실한 갈망이다. 따라서 강자와 부자들은 메시아 왕국을 이단시하고 불법화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기독교의 발자취가 아닌가? 한국 개신교의 행태를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부활을 ‘메시아 왕국의 도래’요, 메시아 왕국의 도래는 곧 ‘민중의 역사적 주체성의 획득’이라고 말하는 서남동 교수는 “몸의 부활은 메시아 왕국에 결부된 역사적, 사회적 신앙의 상징이다. 몸의 부활은 천국으로 왕생한다는 약속이 아니라 이 세계의 불의와 억압에 항거하여 역사의 새 시대에 다시 부활 하생한다는 민중의 의지이며 그 갈망이다. 영혼 불멸과 신국이 지배자의 유혹으로 쓰여지는데 대해서,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서의 몸의 부활은 눌린 자의 갈망을 그대로 말하는 신앙이라는 말이다. 부활은 민중의 역사적, 사회적 갈망이다.”라고 말한다.
구약성서학자 폰 라트(G. von Rad)도 말한바, ‘출애굽 사건은 창조신앙에 선행’한다. 사실, 이스라엘의 하나님 표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시킨 역사적 해방 행위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처럼 존재 철학적 관점이 아니었다. 애굽에서 억울하게 종살이를 하던 보잘 것 없던 백성 합비루(habiru)들이 하나님의 해방 행위를 통해 그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뿌리 경험’이며 억눌린 모든 집단을 위한 정의의 모형이 될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가 성경에 가장 먼저 나와 있기에 ‘신의 천지창조’를 신앙에 강요하지 말고, 그 다음 나오는 출애굽기의 ‘출애굽 정신’을 따를 것인지를 묻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난과 부활의 참의미는 창조신앙에서 출애굽 정신으로 변화될 때 가능할 것이다.

4. 부활절의 참의미
도대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참의미는 무엇인가?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는 한국의 종교가 죽음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서, 유교는 ‘주검’에 관심이 있고, 불교는 ‘죽음’에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교는 ‘죽임’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사실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한 사형틀이다. 안병문 박사가 보기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임사건은 철저히 집단적이다. 예수 한 개인이 아닌, 인류에게 일어난 집단적 사건이다. 그 집단적 죽임사건은 예수 개인이 죽었으나, 그것으로 묶어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긴긴 인류역사 속에서 계속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연속되었는데 예수의 죽임만이 이토록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되는 것은 죽임을 죽임으로 맞서지 않고 죽임을 증거 하는 것으로 맞선 성서의 민중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예수 당시 젤롯당처럼 죽임을 죽임으로 맞서는 방법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운동방식인 죽임을 증거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증거 하는 일, 그것이 죽임의 세력을 어떻게 끝장낼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우리들의 두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는가? 세월호의 죽임과 그 죽임을 증거한 기억저장소, 그리고 마침내 비폭력적인 집회와 민주적 절차에 따른 거대 권력의 탄핵! 따라서 세월호 3주기가 부활절과 같은 날(2017.4.16.)인 것은 너무나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마르크스의 말이기는 하지만, 오늘 이 땅에 역사는 수십번 비극으로 반복이 되었다. 결코 희극으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한국말년사』 (덕흥서림, 1945)에서 저자 장도빈은 “1884년 갑신 이후로 1894년 갑오에 이르는 10년 사이는 그 악정이 날로 심하여 그야말로 큰 고기는 중간 고기를 먹고, 중간 고기는 작은 고기를 먹어 2000만 민중이 어육이 되고 말았다. 관부의 악정과 귀족의 학대에 울고 있는 민중이 이제는 참으로 그 생활을 보존할 수 없게 됐다. 삶이 위태한 민중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의 추세였다.”라고 한다. 지금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시 부활할 것이다. 2000년 전 갈릴리 예수의 정신과 눈물로, 동학의 정신으로, 그리고 4월과 5월, 6월의 함성(419, 518, 6월 항쟁)으로, 마침내 그것은 이제 한겨울 매서운 추위 속 촛불의 힘으로, 새 봄의 역사로, 소중한 한 표의 힘으로!

최병학 목사.JPG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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