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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5] 알렌(H. N. Allen)의 눈에 비친 부산
2017/04/10 17:5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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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구도시 부산은 한국현대사를 오롯이 품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작은 어촌인 ‘부산포’에 불과했으나 세월과 함께 중요한 포구로 자리 잡았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부산은 대일본 교섭창구였고, 강화도조약으로 부산은 개항장이 됐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대륙침략의 교두보가 되어 해양과 대륙이 만나는 접점이기도 했다. 이런 여정에서 부산은 선교사들을 포함한 이국인들이 조선으로 향하는 첫 기착지였다. 이국인들은 대체로 요코하마를 거쳐 부산으로 입국하였고 다시 제물포를 거쳐 입경했다. 초기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의 당연한 여정이었다. 광복동 롯데점 맞은편 남포동 5번 출구쪽에는 부산을 거쳐 간 초기 선교사들을 기념하는 기념석이 세워져 있다. 이 기념석 설치를 위해 부기총과 박수웅 목사가 많은 수고를 했고 부산 중구청은 이를 지원했다. 필자는 기념석에 들어갈 글을 썼다. 내용이 길다하여 줄였지만 부산이 선교사들의 첫 기착지라는 점을 밝혀 두었다.   
부산을 거쳐 간 첫 선교사가 바로 미국북장로교회의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었다. 상하이에서 일하던 알렌이 1884년 9월 14일 상해를 떠나 그날 부산을 거쳐 재물포로 입국하여 9월 20일 서울로 갔는데, 그는 본래 중국 상해에 파송된 선교사였다. 그가 오하이오주 델라웨어를 떠나 임지인 중국으로 떠난 날은 1883년 8월 20일 월요일이었다. 9월 4일에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로 향했고, 상해에 도착한 날은 10월 11일 목요일이었다. 중국에 온지 채 일 년 안 되 그는 임지를 바꾸어 1884년 9월 14일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그날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난징(S.S. Nanzing)호로 조선으로 향했다. 멀미약 브롬화물을 먹지 않았더니 배 멀미가 심했다. 나가사키(長崎)와 부산 중간 해상에서 태풍을 만났다. 많은 작은 선박이 태풍에 휩쓸려 유실되었지만 우리가 탄 난징호는 무사했다. 부산은 완전히 왜색(倭色)도시이다. 도시 변두리로 가지 않고는 조선 사람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일본인은 아주 우아한 흰 건물을 영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양 사람으로는 부산세관장 로바트(W. N. Lovatt), 항무관(港務官) 파스튜니우스(Pasthunious), 레이놀즈(Reynolds), 저지(Jersey), 크로브스(Crobs)씨와 그의 이탈리아인 보조원 정도이다. 부산은 북로전선(Northern Telegraphic Lines)과 연결되어 있다. 부산은 훌륭한 항구이다. 그러나 전기가 없고 편의시설이 없다.” 이것이 알렌이 본 부산의 첫 모습이었다. 그가 본 곳은 부산항 중심지였는데, 부산은 왜색도시라는 것이 그의 관찰이었다.
9월 20일 토요일 제물포에 도착한 그는 22일 월요일 오전 8시 서울로 향했고, 공식적으로 조선에 거주하는 첫 선교사가 된다. 그런데 그는 조선에 온지 2주가 지난 10월 1일 북장로교선교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도착보고 서한을 보내는데, 이 편지에서 부산에 대해 이렇게 썼다.
“지난 가을에는 아담한 증기선이 상해와 조선의 몇몇 개항장을 운행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조선 남쪽의 일본인 항구인 부산입니다. 그곳에는 지난 200여 년 동안 지속된 일본 무역 거류지가 있다는 것 외에 특별히 흥미 있는 곳이 없습니다. 지금은 세 채의 외국식 가옥과 외국 세관 직원들이 있습니다.” 10월 8일자로 엘린우드에게 쓴 편지에서도 부산을 언급하는데 왜색도시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약 한달 전 상해를 떠나 조선에 왔습니다. 부산과 제물포를 봤는데, 선교 사역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산은 일본 도시이고 제물포는 외국인 거주지로 눈에 뜁니다.” 이 편지를 쓰고 3일이 지난 10월 11일 알렌은 상해에 남아 있던 가족을 데리러 상해로 향했다. 이번에도 난징호를 타고 나가사키를 거쳐 17일 상해에 도착했고, 20일 부인과 아기, 중국인 유모를 데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조선으로의 귀환은 역순이었는데, 부산은 조선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그는 1884년 9월 내한하여 선교사로 일하는 한편, 주한미공사관의 서기, 대리공사, 전권공사 등을 역임하였고, 1905년 5월 루즈벨트에 의해 공사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할 때까지 21년간 한국에서 선교사 혹은 외교관으로 살았기 때문에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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