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7.11.23 16:24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5 - 권력과 폭력
2017/03/23 15:1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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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폭력: 관용과 ‘폭력에 관한 고고학’
“걸작은 새로운 다중을 창조한다.”(질 들뢰즈)
 
질 들뢰즈에 의하면 걸작의 참된 의미는 대중의 주어진 감수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중’(다중)을 창조하는 것, 대중이 듣기 원하는 입에 발린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감수성을 창조하고, 현실 안에 잠재된 어떤 힘을 드러내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는 “문제의 해법에만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도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다.”고 한다. 옳지 않은 문제에 옳지 않는 답도 문제지만, 옳지 않은 문제에 옳은 대답은 더욱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이론과 실천은 두 다리와 같다.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면 왼발이 따라가고, 왼발이 앞으로 나가면 오른발이 따라간다.” 지금 대한민국이 그러하다. 대중이 한발 나가니, 헌법기관이 한발 따라온다. 그렇다면 헌법기관이 한발 나아가면 정치가 한발 따라갈까? 목하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중을 창조하는 걸작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리고 걸작을 창조하는 새로운 지식인이 필요하다.

1. 지식인: 자퀴즈!

20세기 ‘지식인들의 지식인’이었던 장 폴 싸르트르(J. P. Sartre)는 지식인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지식인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계몽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을 첨가하면 참다운 지식인은 세 종류가 된다. 첫째, ‘참견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쌓아올린 명성, 곧 상징자본을 세상을 바꾸는 데 사용하는 지식인이다. 가령, 1898년 드레퓌스 사건의 한복판에서 에밀 졸라(É. F. Zola)가 소설 쓰기를 제쳐두고 “자퀴즈!”(J’accuse!) 곧 “나는 고발한다.”라고 외치고 나섰을 때, 반드레퓌스 우익세력이 한목소리로 작가가 왜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어드느냐고 비난의 화살을 쏘는 순간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탄생했다. 둘째, ‘계몽적 지식인’은 소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에서 스스로 철학자라고 불렀던 지식인들, 곧 (프랑스로 한정하여) 볼테르,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로 만들었다. 중세의 타락한 가톨릭 교회 권력에 맞서 미몽의 세상에 빛을 끌어들였던 참 계몽적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유기적 지식인’은 일찍이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가 말했던 바, ‘사회 계급의 신경 노릇을 하는 지식인’이다.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이야말로 그람시적 지식인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 부류의 지식인은 당대 피억압자를 대신해 그들의 대표자, 대변자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지식인, 곧 대중 위에서 대중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지식인은 죽었다. 대중이 스스로 지식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이러한 지식인이 퇴장한 것일까? 아니면, 침묵 속에 짓눌려 익사당한 것일까?¹ 지금 대한민국은 후자에서 전자로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그 지식과 대중은 정치적 권력을 차지할 것인가?

2.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다른 사람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대통령의 국정농단)이기도 하며, ‘다양한 의견을 모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대통령 탄핵)이기도 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우리 일상생활 주변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스티븐 룩스(S. Lukes)는 『3차원적 권력론』 (나남, 1992)에서 “권력은 1, 2, 3차원으로 분류되는데, ‘직접적인 힘으로 제압하는 권력’인 1차원적 권력과 ‘법이라는 간접적 힘’으로 통치하는 2차원적 권력, 그리고 ‘설득과 영향력으로 부지불식간에 작용’하는 3차원적 권력”이 있다고 한다.

가령, 점심시간에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 담임목사가 자장면을 시켜 먹자고 하면 부목사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 담임목사가 가진 힘을 1차적 권력이라고 한다. 따라서 1차원적 권력은 권력의 일반적인 정의로 국가의 국민에 대한 공권력 행사, 사회적 강자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력 행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행태적(behavioral)’권력이라고도 한다. 2차원적 권력이란 ‘구조적(structural)’ 권력으로, 어떠한 문제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표면 위로 올릴 수 있는 혹은 올리지 않는 권력을 뜻한다. 교회 내적 문제에 관하여 당회가 막강한 권력으로 사안을 결정하여 좌지우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구조적 강자가 소수자의 의견을 아예 제도적, 혹은 원천적으로 막아서 그들의 의견이 수면위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권력을 뜻한다. 3차원적 권력은 ‘구성적(constitutive)’ 권력으로,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권력을 말한다. 그러나 보통 언론이나 매체의 권력을 뜻하기도 한다. 가령, 조선일보가 노조에 대해 ‘귀족노조’식으로 폄하하여 기사를 쓴다면(교회적으로는 여론을 형성하는 대형교회가 담론을 형성하면) 사람들의 생각도 노조를 ‘귀족노조’로 구성한다는 의미에서의 권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독일 나치스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구성적 권력의 힘이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국민 여론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괴벨스는 선전 수단으로 라디오에 주목했다. 그는 국가 보조금을 풀어 노동자들의 일주일분 급여인 35마르크만 있으면 라디오를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 7시 라디오 뉴스에 ‘오늘의 목소리’라는 코너를 만들어 총리 관저를 르포(reportage)하도록 했다. 나치스 지지 군중대회도 실황으로 전국에 생중계했다. 이러한 괴벨스의 정치 연출의 핵심은 한마디로 “이성은 필요 없다. 대중의 감정과 본능을 자극하라.”라는 것이었다. 반면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은 “국민의 일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속일 수는 있다. 국민의 전부를 일시적으로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의 전부를 끝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괴벨스에서 링컨으로 넘어가고 있다.
1, 2차원적 권력이 구체적으로 권력을 실천하는 것이 폭력이다. 대한민국은 촛불혁명과 헌법제판소의 일련의 절차를 통하여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비폭력과 민주적 혁명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권력과 폭력의 고고학은 어떨까?

3. 폭력의 고고학: “잔혹함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며, 사랑이 없는 잔혹함은 맹목적이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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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tolerance)이란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과 행위 양식을 존중하고 승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이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관용의 전제 조건이다. 이러한 관용은 모든 것을 관대하게 대하는 중립적 관찰자의 태도가 아니라,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그 존재 안에서도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태도이며,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오류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통찰에 근거한다. 그러나 관용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 관용의 정신 자체가 존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민음사, 2006)에서 전체주의 정치체제를 ‘열린사회’와 ‘닫힌사회’의 비유로 통렬하게 비판한 칼 포퍼(K. R. Popper)는 이것을 ‘관용의 역설(paradox of tolerance)’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무 제약 없는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불러온다. 우리가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불관용의 습격에서 관용적인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회와 관용 정신 그 자체가 파괴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천명해야 한다.” 열린사회(the open society)는 전체주의와 대립되는 개인주의 사회이며 사회 전체의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차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점진주의 사회이다. 반면 닫힌사회(the closed society)는 불변적인 금기와 마술 속에 살아가는 원시적 종족 사회로서 국가가 시민생활 전체를 규명하며 개인의 판단이나 책임은 무시되는 사회이다. 지금 지금 대한민국은 열린사회 안에 작은 닫힌사회가 있다. 이 닫힌사회 속에 갇힌 어르신들을 사랑해야 할까? 아니면 이러한 관용의 역설에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천명해야 할까? 폭력의 고고학을 소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폭력에 관한 고고학’의 첫째 이론가인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W. Benjamin)은 에세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 (1920)에서 “폭력에는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이 있다. 신화적 폭력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가리키고, 신적 폭력의 ‘신’은 유대교의 신, 곧 야훼를 가리킨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 신화 속의 ‘니오베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아들 일곱명과 딸 일곱명을 두었는데, 그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니오베는 불경죄를 저질렀는데, 자신이 레토(Leto) 여신보다 더 훌륭하다고 뽐냈던 것이다. 레토에게는 아들 아폴론과 딸 아르테미스 한명씩밖에 없었다. 따라서 화가 난 레토는 아폴론으로 하여금 니오베의 아들들을 죽이게 하고, 아르테미스는 딸들을 죽이게 하였다. 자식을 모두 잃은 니오베는 울며 세월을 보내다 돌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레토의 분노가 바로 신화적 폭력이다.
 
반면, 벤야민이 든 신적 폭력의 사례는 구약 민수기의 ‘고라의 반역’이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었으나,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 모세가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것이 반기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같은 레위지파 후손으로서 모세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는 데 대한 질투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모세에 대한 반역은 모세에게 권위를 준 야훼에 대한 반역이다. 따라서 모세가 야훼의 공정한 심판을 요청하자,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솟아 고라의 무리는 한꺼번에 소멸 당했다.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이르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민수기 16:32-35).”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그렇다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의 차이는 무엇인가? 벤야민은 “신화적 폭력이 법 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한다.”라고 말한다. 곧, 신화적 폭력이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는 폭력, 다시 말해 지배를 구축하고 유지하려는 폭력인 데 반해, 신적 폭력은 그런 법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폭력인 것이다. 벤야민은 이 신적 폭력을 ‘순수한 폭력’이라고 옹호하였다. ‘신화적 폭력이 생명체를 희생시킴으로 자족하지만, 신적 폭력은 생명체를 위해, 생명체를 구현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약간의 신학적 무리수가 있긴 하지만, ‘레토(신)-니오베(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모세)-인간(고라)의 관계’에 ‘신이 폭력으로 편들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신화적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이 되지만, 신적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한쪽을 편들어 주는 것이다(물론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한쪽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벤야민이 쓰는 ‘폭력’의 의미란 무엇인가? 독일어 ‘Gewalt’는 ‘힘ㆍ폭력ㆍ권력ㆍ권능ㆍ무력’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벤야민이 다루는 폭력은 ‘윤리적 상황’과 관련된 폭력을 뜻한다. 가령, 화산폭발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으로서의 폭력은 고찰대상에서 배제한다. 따라서 폭력이 윤리적 현상으로 파악된다면, 그때 폭력은 법과 정의와 관련된다. 곧, 벤야민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법적 폭력’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폭력은 이성의 한계에서, 법은 이성의 정당한 출발점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폭력은 정치의 근원이자 토대이고, 법은 정치의 종점”이라고 한다. 곧, 세상의 폭력을 제어하는 것이 법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궁극적이고 내재적인 목적이 폭력 내지 권력을 통해 세상을 통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신화적 폭력이 법에 준거하는 것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을 파괴한다. 전자가 경계를 설정한다면 후자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자가 죄를 만들고 속죄하게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죄를 제거한다. 전자가 협박적이라면 후자는 충격적이고, 전자가 피의 냄새를 풍긴다면 후자는 피의 냄새가 없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폭력에 관한 고고학’ 그 두 번째 이론가인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법의 힘』 (1994)에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이 텍스트에서 발견하는 가장 가공할 만한 것은 … (하나의) 유혹이다. 어떤 유혹 말인가? 대학살을 신적 폭력의 해석 불가능한 발현의 하나로 사고하려는 유혹”이라고 비판 한다. 사실 데리다와 달리 벤야민은 파쇼의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신적 폭력으로서 메시아를 요청’하는 벤야민을 데리다는 이해하기는 하나, 이러한 벤야민의 폭력론은 좌파와 우파가 뚜렷하게 구분되기 이전의 ‘혼란스러운 근친성’ 속에서 저술된 것이며, 그런 만큼 위험을 내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베냐민의 신적 폭력, 곧 피도 흘리지 않고 한꺼번에 내리치며 휩쓸어버리는 신의 폭력이 ‘최종 해결’이라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읽혀질 수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대학살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의 한 모습이 될 것이다. 만약 모세를 나치로, 고라를 유대인으로 본다면 데리다의 비판은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폭력에 관한 고고학’ 그 세 번째 이론가인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 Agamben)은 『호모 사케르』(1995)에서 “신적 폭력을 ‘최종 해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데리다의 주장은 정말 독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오해이다.”라고 비판한다. 또한 ‘폭력에 관한 고고학’ 그 네 번째 이론가인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 Zizek)은 아감벤과 같이 데리다의 ‘오해’를 비판하고, 베냐민의 ‘신적 폭력’을 옹호한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에서 “신적 폭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모호함을 피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벤야민의 신적 폭력의 구체적 사례로 프랑스 대혁명의 자코뱅(Jacobins, Jacobin Club) 공포정치², 그리고 1919년 러시아 내전 때 붉은 군대의 ‘테러리즘’을 거론한다. 아무튼,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신적 폭력이라는 이름의 ‘순수한 혁명적 폭력’을 변호한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신적 폭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저지르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대항 폭력이며 이러한 신적 폭력은 그 내부에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고라를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본다는 말일 것이다.) 체 게바라도 “진정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 이끌린다.”고 했다. 곧 사랑이 없으면 혁명도 없는 것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I. Kant)의 명제를 비틀어 지젝은 “잔혹함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며, 사랑이 없는 잔혹함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혁명은 잔혹, 곧 폭력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결론이다.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부활의 기쁨이 없다는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역설적으로 폭력의 역사를 통해 메시아의 신적 폭력의 그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을 국가로 확장하면 성 어거스틴(A. Augustinus)의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을 살펴볼 수가 있다. 어거스틴은 “자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금지되나 살해인 경우,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실천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인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이러한 살인에 대한 부분적 허용이 ‘정당한 전쟁론’으로 발전했는데, 그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8개의 기본원칙은 “첫째 하나님의 공의를 침해하는 경우, 둘째 전쟁의 악함이 현저하다고 도덕적으로 판단될 때, 셋째 폭력의 사용을 위한 정당성이 인정될 때, 넷째 국가의 영적인 상태가 심각히 위협을 받을 때, 다섯째 신앙생활에서 복음적 기준의 해석들이 위협을 받을 때, 여섯째 불의한 사회적 변화에 더 이상 수동적 태도만으로 일관할 수 없을 때, 일곱째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성서에 비추어보았을 때도 적절했을 때, 여덟째 평화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라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상태인가? 폭력의 고고학은 미래 권력을 향하여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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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사실 ‘지식인의 고향’, ‘지식인의 태반’이었던 대학이 대기업과 대자본의 하청업체가 되어 버렸다. 대학은 ‘죽은 지식인들의 묘지’가 되어 버렸고, 앞으로도 더 극심해질 이러한 세상에 싸르트르적 지식인의 ‘불온한 기운’이 부활해야 할 것이다. 계몽적 지식인이 권력에 맞서 미몽의 세상에 빛을 밝혀야 한다. 그리하여 이 땅의 수많은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불의에 대한 저항’의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2) 자코뱅파는 프랑스 혁명기에 생긴 정당 중 하나로 프랑스 혁명을 주도하였다. 파리의 자코뱅 수도원을 본거지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혁명을 추진하였다. 국민 공회에서 왼쪽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좌익의 어원이 되었다. 물론, 마르크스가 높이 평가했으며, 따라서 공산주의의 사상적 뿌리라 할 수 있다.

최병학 목사.JPG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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