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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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부산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우리의 눈이 아닌 외부자의 분에 비친 부산의 모습이 궁금하다.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을 찾는 이국인들이 점증하면서 부산은 타자의 앵글을 통해 서방에 소개되었고, ‘금지된 나라’(terra incognito)에 대한 진기한 기록은 서방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런 기록이 여행객이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굴꾼들에게도 비상한 관심을 끌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기록들이 조선 선교를 꿈꾸는 복음의 전령들에게도 가뭄에 비 오듯 소중한 정보였다. 이런 기록 중의 하나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의 조선과 부산 방문기였다.
 
1831년 영국 요크셔의 버러 브릿지에서 영국국교회 곧 성공회 목사 에드워드 버드(Edward Bird)의 딸로 태어난 이사벨라는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을 시작하면서 차츰 건강을 회복하였고, 그의 미국 여행기가 주목을 받으면서 전문적인 여행가로 일생을 살게 된다. 예리한 통찰력과 상당한 문필력은 그의 비장의 무기였다. 존 비숍박사와 결혼했으나 5년 후 사별하게 되어 가정사에 매이지 않게 되었고, 미지의 세계를 향한 금지된 열정은 그 이후 30년간 계속된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 일본, 인도, 티베트, 페르시아, 쿠르디스탄 등을 방문하고 조선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는 앞서간 자의 자취를 따르기 보다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오지의 개척자였다. 그가 1894년 겨울과 1897년 봄 사이 4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했고, 조선에 체류한 기간은 11개월에 달했다. 고종과 명성왕후를 만났고, 서울을 비롯한 조선 반도를 여행하며 부산을 방문했다. 그가 남긴 조선 방문기가 여전히 고전적인 지리지로 읽혀지고 있는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1897)이다. 이 책은 헐바트(Homer Hulbert)의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와 그리피스(Griffis)의 『은자의 나라 조선』(Hermit Kingdom)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에 대한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이 당시 이국인의 눈에 비친 부산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다. 비숍은 부산을 방문하고, 일본인 거류지는 그처럼 깨끗하지만 조선인 거류지는 더럽고 불결하다고 했다.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도 처음 부산을 방문했을 때, 토담과 흙과 짚으로 엮은 지붕만 보고 마을을 보지 못했다며, “집이라고는 마치 큰 벌집같이 보였다”고 1885년 4월 2일자 일기에서 쓴 일이 있다. 그가 나가사키항을 거쳐 부산에 처음 왔는데, 부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부산이 처참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조선마을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좁고 더러운 거리에는 진흙을 발라 창문도 없이 울타리를 세운 오두막집, 밀짚지붕, 그리고 깊은 처마, 마당으로부터 2피트 높이의 굴뚝이 솟아있었고 가장 바깥에는 고체와 액체의 폐기물들이 어지럽게 버려진 개천이 있었다. 더러운 개와 반라이거나 전라인 채 눈에 보이지 않는 때 많은 어린 아이들이 두껍게 쌓인 먼지와 진흙 속에 뒹굴거나, 햇빛을 바라보며 헐떡거리거나 눈을 껌뻑거리기도 하며 심한 악취에도 아무렇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부산진에 체류하던 호주선교사들도 만났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조선의 여인들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여선교사들을 보면서 애정 어린 격려를 했고 그들의 봉사가 부산과 조선을 보다 개화된 나라로 만들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불결한 거리, 질퍽거리는 습기 찬 도로, 남루한 복장, 가난에 찌든” 부산의 조선인들에 대한 묘사가 부산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현실의 기술일 뿐이었다. 이런 현실에서도 개의치 않고 복음전도자로 일했던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비숍의 기록은 영국은 물론 호주와 미국, 뉴질랜드로 전파되었고 조선과 부산을 헤아리는 작은 안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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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4] 이사벨라 비숍의 눈에 비친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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