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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4 : 레짐
2017/02/16 16:5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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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증 자본주의와 디스토피아: ‘적의 계보학’에서 ‘음악, 시의 세상’을 향하여
“천국에 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옥에 가는 길을 숙지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

1. 앙시앵 레짐: 적의 계보학과 꼰대의 등장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 Lacan)의 상징계(the Symbolic)처럼 우리는 태어나면서 언어와 사회 질서, 혹은 체제(regime)에 속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인 것이다. 불교 문화권에 태어난 사람은 불교 문화를 자연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유교 문화를 상징계로 접한 사람은 유교의 이상을 자연스럽게 그의 가치관이나 사상에 반영할 것이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팔레스틴 땅, 식민지 이스라엘과 주변 강대국의 문화와 영향은 예수의 말씀에 녹녹히 녹아있다. 예수의 비유가 그러하며 그의 날선 생명의 말씀이 그러하다.
이토록 레짐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본질적 상황이다. 그리고 이 레짐은 완결되지 않았고 완전하지도 않다. 보수는 기존 체제를 지키려 하고 진보는 그 체제를 변화시키려 한다. 여기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적의 개념을 상정하고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과 ‘누보 레짐(nouveau regime, 혁명 이후의 신체제)’이 체제수호와 변화의 변증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앙시앵 레짐을 풍자한 그림.jpg▲ 앙시앵 레짐을 풍자한 그림
 
가상의 복제물이 실체를 가리고 대신한다고 말하는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는 ‘적의 계보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적(敵)은 최초 단계에서 ‘늑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다음 단계에는 ‘쥐’(제발, 특정인을 연상하지 마시라!)의 형태, 그리고 ‘기생충’의 모습으로 다가오다가 마지막에는 ‘바이러스’의 형태로 나타난다.” 늑대는 울타리 밖에 선명한 적으로 존재하니, 비록 그 공포와 폭력의 서슬은 시퍼렇되, 전선이 분명한 만큼 대적하기도 단순하고 쉽다고 한다. 그러나 쥐는 야음을 틈타 은밀히 우리를 갉아먹는다. 지하벙커 같은 음습한 어둠을 좋아하며, 울타리를 아무리 견고하게 둘러쳐도 끈질기게 집안 깊숙이 들어온다. 따라서 우리들의 허술하고 지저분한 비위생성이야말로 쥐에겐 좋은 서식처가 된다.

쥐의 단계를 넘어선 적은 이제 기생충의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부지불식간에 내 몸 안에 들어와 기생과 숙주의 관계로 진화한다. 숙주로 하여금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대게 하거나,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긴다. 따라서 내 몸속의 적은 나의 탐욕을 조장하여 나 자신을 살찌운다. 숙주인 나는 날로 허허로워 치열하게 탐욕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기생충만 살찌울 뿐이다. 그러나 이 단계까지 적은 나와 구별되는 타자성을 극복하지 못한고 있다. 따라서 그만큼 대적하기가 용이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 적이 바이러스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어진다. 적이 나인지, 내가 적인지 헷갈린다. 적의 낯선 타자성이 사라지고 어느덧 내 안에 내재화된다. 심지어 적은 나로 하여금 나를 타자화하여 주체를 전복시킨다. 소외와 일탈이라는 비정상성이 일상화되어 정상성으로 둔갑한다. 일종의 착란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실 2017년 2월의 대한민국은 지금 체제와 사람 모두 착란상태에 빠져있다.

상징계의 이러한 착란상태에 항상 라캉의 상상계(The Imaginary, 타자를 자신으로 오인하는 허구적인 주체의 단계)로 퇴보하며 상징계를 뒤덮는 꼰대가 등장한다. 꼰대는 기성세대나 선생님을 뜻하는 은어로도 쓰였던 말인데, 프랑스 단어 ‘콩테(comte, 백작)’에서 유래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부터 백작, 공작, 후작 등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이 스스로를 콩테라고 자랑하고 다녔는데, 이를 비웃던 백성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꼰대’라고 불렀던 것이다. 꼰대는 심리학적으로 ‘자기만 옳다고 느끼는 경향(sense of self rightness)’, ‘스스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경향(sense of self entitlement)’을 말한다. 기본적인 상식과 통념을 부정하면서 전문가의 권위만을 내세운다. 자기만 옳고 똑똑하며, 돈과 명예까지 가졌으니 대접받아야 된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과 주변에 이러한 꼰대는 널려있다. 나이, 성별과 무관하게 계급장을 내세우고, 대접받고 싶어 한다면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가장 대표적인 꼰대인 굉꼰(굉장한 꼰대), 젊꼰(젊은 꼰대). 여꼰(여자 꼰대) 등. 따라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를 대화의 주체로 존중하지 않고 가르쳐야 한다고 여기면 꼰대가 되어간다는 위험신호라고 할 수 있다.¹ 그러나 문제는 이 꼰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로, 곧 레짐으로 확장될 때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분열증적 자본주의의 폭력 사회 체제 속에서 우리는 개인의 ‘힐링(마음 치유)’을 넘어 ‘권력의 미시적 짜임’을 날카롭게 들춰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2. 분열증 자본주의와 디스토피아
 
들뢰즈/가타리(G. Deleuze/F. Gautari)는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에서 “초점은 장군이 아니라 하급 장교들, 하사관들, 내 안에 있는 병사, 심술궂은 자이며, 이들 각각은 나름대로 성향들, 극들, 갈등들, 힘의 관계를 갖고 있다 … 억압당하는 자가 억압의 체계 속에서 항상 능동적인 자리를 취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은 마조히즘이 아니라 바로 이 미시적 짜임이다.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제3세계에 대한 착취, 독재자들의 무장, 대기 오염에 능동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좀-나무, 탈영토화-재영토화, 무리-군중, 사본-지도, 분자-그램분자, 소수-다수, 유목성-정주성, 전쟁 기계-국가 장치, 매끈한 판-홈이 팬 판’과 같은 무수한 이항 대립의 쌍을 변주하며, 사유의 방식, 기능, 양태들에 대해 설명하는(여기에는 무수한 자의적 개념이 춤추고 있다. 가령 리좀, 동물-되기, 소수-되기, 영토화와 탈영토화, 포획, 탈주선, 지층과 지층화, 기관 없는 신체, 얼굴성, 추상기계, 배치,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팬 공간, 공리계의 접합접속 등등) 들뢰즈&가타리는 ‘차이의 철학’, 혹은 ‘욕망의 미시정치학’에 대해 말하기 위해 생물학과 언어학과 음악학과 경제학과 정치학을 가로지르며 다양체가 의식과 무의식, 자연과 역사,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미쳐 날뛰는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자본주의는 그 본질에서 분열증 자체이다. 주기적으로 위기는 돌아오고 증식하고 소멸하며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환투기와 주식 투매의 미친 바람이 불고, 자본은 이익이 있는 곳으로 순간 휘몰아쳤다가 자양분을 빨아먹고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자본의 유동적 흐름은 포식자처럼 취약한 외환시장과 주식 거래를 삼켜버린 뒤 소화할 수 없는 뼈들만 뱉어낸다. 전 지구적 규모의 자본주의라는 정글에 방목된 사자들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운용되는 토끼들을 사냥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의 사자들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서두에 인용했듯이 ‘지옥에 가는 길을 숙지’하면 되는 것인가?

들뢰즈/가타리는 이렇게 말한다. “점유하고, 거주하며, 보존하는 영토에서 끊임없이 달아나라! 늑대 한 마리가 아니라 늑대 무리로 달아나라! 무리로 달아나야만 하나의 도주로가 아니라 천 개의 도주로를 만들 수 있다. 하나는 붙잡히지만 천 개는 붙잡히지 않는다. 경로를 따르지 말고 그것을 자주 이탈하라! 내가 어디로 움직일지 그들이 알 수 없게 하라! 정주민들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머리둘 곳 없는 방랑자 예수와 그와 함께한 세리와 죄인들의 모습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따라서 『천 개의 고원』은 화폐와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기계’의 포획에서 도망가도록 부추긴다. 국가-기계는 수많은 금기의 거미줄을 만든다. 제도들과 정책, 법과 치안의 그물로 국민을 포획하고 국가라는 지층에 편입시킨다. 따라서 조세와 병역 의무를 지우는 국가의 다양한 포획 장치로부터, 자본주의의 기계들(이를테면 정부, 한국은행, 군대, 나아가 학교, 종교단체 등)로부터 도망가라. 그때 구원의 문이 열릴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마태 2:3)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utopia)의 반대말이다.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므로, 디스토피아는 ‘어두운 미래 또는 현실’이 된다. 커지는 빈부격차와 취업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 해법이 보이지 않는 교육·부동산 문제 등을 배경으로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와 담론에서 디스토피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어려웠지만 앞날에 대해선 낙관적이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역동감 있는 문화 콘텐츠와 상반되는 문화적 흐름이었는데, 이는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에 더 급진적 디스토피아로 전락했다.

디스토피아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체제 디스토피아, 인간 디스토피아, 문명디스토피아’가 그것이다. 체제 디스토피아는 ‘개선이 거의 불가능한 억압적인 체제’와 관련된다. 국가와 거대자본은 물론이고, 실생활에서 고통을 느끼는 모든 분야가 그 대상이 된다. 인간 디스토피아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환멸로 인한 디스토피아이다. 미시적이나, 사회 발전과 문명의 주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문명 디스토피아는 현대 문명의 비관적인 전망과 연관되어 있다. 기후변화,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새 전염병, 외계인의 습격 등이 단골 소재가 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개신교는 물론 대한민국은 지금 ‘체제 디스토피아’의 최전성기가 무너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과 이후 해경·청와대·경찰·검찰·정치권 등 각 체제가 보여준 모습은 ‘체제 디스토피아의 완결판이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김기춘-황교안-우병우 라인은 그 마지막 보루이다. 또한 ‘인간 디스토피아’는 그 정점을 찍었다. 청문회에 등장한 기득권층 인사와 고위 관료 등의 일그러진 모습을 통해 더 이상의 사회 발전과 문명의 주체를 긍정 할 수 있는 인간 유토피아를 상실했다. 다만, ‘문명 디스토피아’를 통해 다중들이 조용히 제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과 시의 세상을 누보 레짐으로 열 것이다. 

3. 누보 레짐: 음악과 시의 시대로
음악은 도레미파솔라시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음악의 음들에 관해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음악의 음들은 저마다 우주, 혹은 천문학적 공간 속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어떤 것과 상응한다.”라고 말한다. 가령 레는 ‘레지나 아스트리스(별들의 여왕인 달)’, 미는 ‘믹스투스 오르비스(선과 악이 섞여 있는 장소인 지구)’, 파는 ‘파툼(운명)’, 솔은 ‘솔라리스(태앙)’, 라는 ‘락테우스 오르비스(은하수)’, 시는 ‘시데루에스 오르비스(별이 총총한 하늘)’, 도는 ‘도미누스(신)’. 따라서 ‘달-지구-운명-태양-은하수-하늘-신’의 단계로 상승하는 음계를 통해 영적 지식의 향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달과 지구에 국한된 인간의 운명은 태양과 은하수, 하늘에 속한 신의 레짐으로 귀속될 때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은 그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시 해설집 『홀림 떨림 울림』 (나남, 2013)에서 이영광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좋은 시는 먼저 읽는 이에게서 생각이란 걸 빼앗아 갔다가는, 천천히 되돌려주는 것 같다. 그 찌릿찌릿한 수용과정은 ‘홀림-떨림-울림’으로 진행된다.” 시도 그렇지만, 2017년은 타자의 아픔에 홀려 가슴이 떨리고, 몸 전체에 큰 울림으로 남아 울림이 홀림이 되어 더 큰 떨림이 되기를 바란다. 이영광 시인도 “지상의 영화를 찬양하는 종교가 없듯이 현세의 복락을 지지하는 시도 근본적으로는 없고, … 어떤 종교는 고통 그것도 허망이라고 가르치지만, 모든 시는 허망을 고통이라 느끼는 곳에서부터 말을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결국 타자의 아픔에 홀려, 자신을 그 고통 가운데 내어주었고, 그 숭고한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큰 떨림을 주었고, 이제 시대를 넘어 큰 울림으로 변한 것 아닌가? 그리고 그 홀림은 계이름 ‘레’로부터 시작하여 ‘도’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목하, 음악과 시의 시대가 이 앙시앵 레짐의 시대, 곧 적의 계보학과 꼰대들의 시대에 새 희망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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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지침’ 5가지에 관해 북키닷컴 개발자인 이준행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나이를 먼저 묻지 마라. 한국 사회에서 버젓이 나이를 묻는 것은 상대방과 위아래를 겨루자는 의미이다. 자신이 나이가 더 많음을 상대에게 주지시키고,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음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둘째, 함부로 호구조사를 하거나 삶에 참견하지 마라. 차라리 좋아하는 음식이나 동물을 물어보라. 셋째, 자랑을 늘어놓지 마라. 당신의 인생 자랑은 노잼이다. 당신이 살아온 시절에 대한 자랑은 당신에게만 유효하다. 당신의 인맥 자랑은 당신에게 잘 보이라는 알량한 호소임을 상대방은 너무나도 잘 알아챈다. 어느 것으로도 결코 유익하지 않다. 넷째, ‘딸 같아서 조언하는데같은 수사는 붙이지 마라. 인생 선배로서 조언한다는 이야기도 먼저 꺼내지 마라. 당신이 걸어온 길이 매력적이라면 상대가 알아서 물어올 것이다. 다섯째, 나이나 지위로 대우받으려 하지 마라. 나이나 지위가 없어도 타인에게 대우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이들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섯째, 스스로가 언제든 꼰대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해라. 나이로 서열을 매기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 꼰대성이란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이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쉽게 꺼내는 내 안의 괴물과도 같다. 그 괴물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꼰대 탈출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상대와 내가 살아온 시간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괴물을 늘 경계하라. 그러면 당신은 꼰대가 아닌 어른에 가까워질 것이다.”

최병학 목사.JPG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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