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7.07.28 17:54 |
다문화 사회, 한국사회의 위기인가 기회인가?
2016/11/18 10:0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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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수 교수.jpg▲ 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 소장 이병수 교수(고신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라”(신10:18-19).
 
국제 다문화 사회연구소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국제 이주민 즉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 국제결혼 부부, 다문화 가정 청소년 및 새터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나그네’, ‘손님’, 그리고 ‘형제, 자매와 자녀’로 맞아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겨 ‘하나님의 가족’으로 초대하기 위한 성경적·신학적·철학적·정책적·선교적·실천적 연구소입니다.

1. 본 연구소는 하나님의 형상교리를 기초로 해서 신학적 및 선교학적 의미를 추구합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국제 이주민들도 기독교인인 우리와 같이 창세기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형상(Immago Dei)’입니다. 본 연구소는 국제 이주자의 한 축을 이루는 무슬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유교도, 불교도, 그리고 힌두교도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무슬림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인 앤서니 후크마는 그의 책 「개혁주의 인간론」에서 ‘하나님의 형상’ 교리로 인간론을 설명합니다. 후크마는 타락한 죄인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에 의하면 “성경은 인간이 죄에 빠진 사실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향상을 심각하게 왜곡시켰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간주해야 한다고도 가르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므로 우리는 그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되며(약3:9)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후크마는 이런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를 칼빈에게서 배웠습니다. 후크마에 의하면 “어느 누구 못지않게 인간의 죄악성과 무가치함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던 존 칼빈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죄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놀랍게 표현했다”하면서 그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우리는 사람들 자신이 어떤 자격이 있는지 고려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 형상에 모든 영예와 사랑을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 사람을 돕기를 거절할 어떤 이유도 없다. 가령 ‘그 사람은 경멸받을 만하고 무가치 하다’고 하자. 그러나 주님은 곧 주님이 자신의 형상의 아름다움을 아끼지 않고 주신 자가 그 사람임을 알려주신다. 가령 그 사람이 당신의 최소한의 노력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자. 그러나 당신에게 그 사람을 천거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이 당신 자신과 당신의 모든 소유를 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파합니다.

후크마는 이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가 가지는 선교적 함의를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교회는 복음전파 내지 선교사역을 할 때 이 땅위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확신을 고수해야”하고 “하나님의 형상교리는 교회의 복음전파의 사명에 있어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조직신학의 장점은 조직신학과 선교학을 통섭(統攝)적으로 보려는 시도와 노력이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그는 칼빈의 신학에 기초한 여러 신앙고백서들을 선교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선교적 함의를 제안했습니다. 조직신학자 후크마의 책을 읽으면서 다른 화란의 교의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개혁교의학」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 책은 최근 고려신학대학원 출신의 박태현 교수가 4권으로 한국어 번역본으로 완성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이 책을 최근에 번역한 것으로 볼 때 이 번역이 한국 신학계에 끼친 공헌은 참으로 귀하고 큰 것입니다. 4권 분량이 약 3,500 쪽에 가깝습니다.
 
바빙크는 그의 책에서 교의학의 실천적 성격을 여러 곳에서 매우 강조합니다. 정말 귀하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책 4권중에 신학의 실천적 성격이 가장 잘 나타야 할 선교에 대해서 책 전반과 관련하여 선교적 함의와 또는 4권에 포함되는 교회론의 부분에서도 교회의 선교적 역할을 언급한 것을 거의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칼빈의「기독교 강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강요 4권에 해당하는 교회론 에서도 칼빈의 선교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역할 중 예배, 교제, 봉사, 그리고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면 교회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조직신학자 에밀 부르너는 “불이 탐으로써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고했습니다. 독일의 조직신학자 마틴 켈러는 “선교는 신학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마틴 켈러의 주장은 교회와 신학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였기 때문에 신학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증거하는 공동체의 요소, 증인의 공동체를 누구보다도 강조한 신학자가 보수신학에서 비판한 독일계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였습니다. 화란 선교학자 요하네스 베르카일은 그의「현대선교신학 개론」에서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특히 III:2권 과 IV: 3권은 선교학에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들 항목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선교를 논의 하면서 교회의 소명은 ‘하나님의 선교의 연속(missio Dei Continuata)’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지상 증거자라.”고 주장합니다. 바르트는 “교회의 선택, 화해, 영적 약속, 소명, 명령 그리고 봉사 등의 배경에 반하여 교회의 소명에 대한 그의 사상을 전개” 하면서 마침내 “만일 교회가 선교의 의무를 실패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혹자는 칼 바르트를 위대한 신학자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선교학자 심지어 “선교사”라고까지 평가했습니다.
 
내가 최근에 만난 화란 선교학자가 헤르만 바빙크의 이런 면을 지적하면서 그에 비하면 아브라함 카이퍼는 모든 부분에서 기여한 바가 지대하지만 그는 또한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같은 신학의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이들이 생기는가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복음전도의 연구의 영국의 대표적 신학자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그의 책 「초대교회의 전도」에서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신학에 관심이 거의 없는 반면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전도에 거의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후크마가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를 단순히 조직신학적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리가 가지는 선교적 함의를 심도 있게 다룬 것을 통해서 모든 학문이 가지는 이론과 실천의 조화와 신학의 통합적 접근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유는 신학은 방법론적으로 이론적이지만 목적은 실천적이고 이것이 성경적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함이라.”(딤후3:16-7)
 
2. 모든 인류는 평등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평등사상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혹자는 모든 인류는 성경이 제시하는 세 가지 신학적 측면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우리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둘째,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요 죄인입니다. 셋째, 따라서 모든 인류는 하나님에게 의존적이고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의 능력 여하에 따라 불평등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한 곳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인간 평등사상을 구체적으로 찾기도 쉽지 않지만 또한 인간 불평등 사상을 찾기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간 불평등 사상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단 한 곳도 없고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평등사상을 찾아본다면 사도행전 17:26 절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곳에서 모든 인류가 “한 혈통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파악함으로 모든 인류가 같은 근원에서 나왔고 따라서 인류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이 주장을 할 그 당시의 문화적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지성의 중심이요 헬라인을 모든 인류보다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아덴에서 인간 평등사상을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가 서구사상에 끼친 긍정적 영향이 지대하지만 그의 인간 평등사상은 매우 부정적이고 실망스럽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야만인들’(그리스인이 아닌 사람), 특히 아시아인은 ‘타고난 노예’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이 땅에 태어나기 수 백 년부터 이런 사상이 편만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유대인의 선민사상과 같이 자부심이 대단한 자민족 중심주의와 우월주의에 빠졌던 대표적 민족입니다. 신약학자 브루스(F. F. Bruce)는 이런 오만한 자부심을 사도행전 17장 26절 주석에서 이렇게 질타합니다. “그러나 이 자부심은 잘못된 근거에서 나온 것이었다. 모든 인류는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으니, 모두 하나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모두 한사람의 공동시조에게서 흘러나왔다. 이 사실은 헬라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외국인들보다 우월하게 태어났다는 믿음을 정당화 시키려는 거짓된 모든 시도를 일소해 버리며,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그와 유사한 오늘날의 국수적 여러 가지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연 안에서도 은혜 안에서도, 즉 옛 창조 안에서도 새 창조 안에서도, 인종우월주의가 들어설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BC 356-323)은 동서양의 결합을 통해 하나 된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동양과 서양을 하나 되게 하고자 시도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위대성은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세계시민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인의 편견과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를 뛰어넘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제자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전쟁터 등의 장소에서 ‘야만인’들과 직접 접촉할 기회를 가지면서 그리스인이 과연 그들보다 우월한지 시험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329년 힌두쿠시를 가로질러 박트리아로 진군할 때는 대규모의 아시아인을 원정 주력군으로 충원했습니다. 그는 아시아 여성 록사나와 결혼했고, 1만 명의 병사들에게도 아시아 출신 아내를 얻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복지로 가는 곳마다 수많은 국제결혼을 시도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인간 평등사상의 가르침이 성경신학·조직신학적 의미의 영역에서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선교의 대상이 되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가르침에 근거한 선교적 함의를 생각해야합니다. 이 가르침은 선교사가 현지인보다 인종적·문화적으로 조금이라도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이 평등사상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이런 우월 사상을 ‘말살’할 것입니다.
이 평등사상에 근거한 본 연구소는 지배욕과 우월사상에 젖은 식민지 제국주의자들이 제 3세계에 저지른 오만과 교만을 처절하게 경험하고 이런 만행에 치를 떨었던 한 국가와 국민으로서 이런 만행이 한국에 살고 있는 제 3세계 사람들에게 자행되지 않도록 평등과 진리의 파수꾼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프랑스 혁명의 3대정신은 자유·평등·박애입니다. 이 평등의 정신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철학자가 영국의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성경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토마스 홉스는 그의 책 「리바이어던 Leviathan 」에서 성경적 인간관과 가깝게 설명한 책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잘 아는 대로 인간의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관계”로 “인간은 서로에게 늑대와 늑대 같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이러한 홉스의 주장을 “마키아벨리의 이론보다 더 근대적이다”라고 평했습니다. 러셀은 “리바이어던이 출간되었을 때, 좋아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평가의 이유는 홉스의 인간에 대한 진술이 너무 충격적일 정도로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인간관 못지않게 그가 끼친 현대적 사상은 인간의 평등에 대한 사상이었습니다. 홉스에 의하면 “자연은 인간이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도록 창조했다. 간혹 육체적 능력이 남보다 더 강한 사람도 있고, 정신적 능력이 남보다 뛰어난 경우도 있지만, 양쪽을 합하여 평가한다면, 인간들 사이에 능력 차이는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다. 왜냐하면 체력이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음모를 꾸미거나, 혹은 같은 처지에 있는 약자들끼리 공모하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능력들의 경우에는 체력보다도 오히려 더 평등하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절대로 차이가 없습니다. 홉스는 이 “능력의 평등에서 희망의 평등이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본 연구소는 이 ‘희망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 능력의 평등을 열심히 가르치고 확산해 나가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 없이 단지 철학적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점만으로는 외국인과 내국인이 하나 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것은 사도바울이 아덴에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고백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류 조상의 근원이 같다는 것이요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것이며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한 가족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가족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근거한 믿음 안에서 진정한 평등사상일 때만 하나 된 세상이 가능한 것입니다. 똑 같이 우리는 ‘인류 조상의 근원이 같고 ‘모든 인류는 평등하고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 평등사상은 그 어떤 인종차별도 허용하지도 않고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본 연구소는 그런 차별을 말살시키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ond Burke)는 “악이 승리하려면 선한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악에 대해서 맞서서 싸워야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본연구소는 성경적 평등사상에 근거해서 외국인을 불평등하게 대하는 어떤 악과 제도와 조직과 싸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려움과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인도 필요하고 악의 세력과 제도와 조직과 맞서고 싸우고 무너뜨리는 정의의 사람도 필요합니다. 제도와 조직은 인간이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언제나 부패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왈츠(Michael Walzer)는 그의 책 「성도의 혁명 The Revolution of Saints: A Study in the Origins of Radical Politics」에서 인간의 모든 조직은 인간의지와 결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언제든 잘못될 수 있고 따라서 잘못된 결정과 의지에 의한 잘못된 제도와 조직은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책에서 주장한 내용입니다.
 
이 마이클 왈츠의 입장을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roff)는 그의 책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 까지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 서문에서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어느 기도문을 인용합니다. “오 하나님, 굶주리는 자들에게는 빵을 주시고, 빵을 가진 우리에게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주소서.” 이 정의의 굶주림으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빵을 제공하는 정책적 연구소가 되겠습니다.
 
3. 본 연구소는 인류학적 고찰을 배울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요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야생의 사고 La Pansee Sauvage」라는 책에서 어떤 문명이나 민족도 다른 집단 보다 우월한 것이 없다고 주장함으로, ‘우수한’ 서구 문명이 ‘미개한’ 원시문화를 지배한다는 서구 우월주의의 편견을 깨뜨렸습니다. 그 책은 이런 서구의 오만한 ‘환상에 대한 해체’를 선언한 책입니다. 그는 이런 인류학적 연구의 결과로 문명의 우열을 뛰어 넘어 상대방의 문화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공존과 상생의 의식을 가지게 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국제이주자와 다문화가정이 겪는 어려움 중 가장 원초적인 것은 그들에 대한 내국인의 편견과 차별입니다. 국제다문화 사회연구소는 외국인과 “차별 없는 세상” “차별 없는 대한민국”을 꿈꿉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는 톨레랑스의 가치와 한계를 직시하면서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인간에 대한 진정성 있는 교육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4.본연구소는 철학적 고찰을 배우고 사용할 것입니다.
 
철학적 단상 프랑스의 유태인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서양철학을 모두 ‘존재론’이라 못 박고 그것을 한 마디로 ‘주체 중심’의 철학이고 주장했습니다. 이 철학은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이’와 ‘다른 것’에 대한 관심과 배려 대신 그들을 자신의 욕망의 충족과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이 철학을 ‘전체주의적 철학’, ‘전쟁의 철학,’ 그리고 ‘이기주의적 철학’이라고 단죄합니다. 이런 주체 중심적 철학은 서구의 오래된 전통 즉 그리스 철학의 영향 이후 서구의 철학 예를 들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내가 곧 세계(소우주)다”라고 생각하는 구조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가 이런 서양 철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서구가 식민지 정복과 1, 2차 세계 대전이 ‘주체 중심’의 철학 즉 ‘전체주의’와 ‘전쟁의 철학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가 시도하고자 한 것은 “전체성의 철학, 또는 전쟁의 철학에 대항해서 어떤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평화의 철학”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주체중심’의 철학에서 생겨나는 ‘전쟁의 철학’에서 ‘평화의 철학’으로 바꿀 수 있는 방안 중의 하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자신이 중심인 ‘주체’ 중심이 아니라 ‘타자’에 초점을 둘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구심점을 ‘나’로부터 ‘다른 이’로 옮기려는 철학의 혁명적 변화의 시도이고 그의 철학에는 어떤 점에서 서구철학의 자아 중심적 인간 사상의 모습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한 인간의 주체성을 '타인을 받아들임(l'hospitalite)' 또는 '타인을 대신한 삶(la sustitution)' 등으로 정의하는 가운데 인간의 삶은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면서도 이 세계는 타인의 관계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 타자를 ‘다른 이의 얼굴’로 묘사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다른 이”는 마치 데카르트(Descates)에 있어서 신(神)과 같이 ‘다른 이’가 ‘영원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다른 이의 얼굴’은 단지 생물학적 물체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우리를 꾸짖고 우리에게 호소하는 ‘고와와 과부’의 얼굴이요 ‘나그네와 이주자’의 얼굴이요 그 안에서 ‘여호와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Mother Terasa)가 고통 받고 있는 타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정한 주체성은 타인의 존재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이 타자에 중심을 두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강조하게 되는데 이것은 오늘날 소외된 ‘고아와 과부’ ‘장애인’ 뿐 만 아니라 ‘이주자’와 ‘다문화가정’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5. 본 연구소는 팔레스타인 출신 기독교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의 책에 언급된 사상을 참고할 것입니다. 많은 학자의 서평에 의하면 이 책은 “서구인들이 말하는 동양의 이미지가 그들의 편견과 왜곡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명저”로 평가받습니다.
 
이 책의 저자 사이드에 의한 오리엔탈리즘의 정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유럽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동양은 단지 인접되어 있다는 점만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지 중에서도 가장 광대하고 풍요하며 오래된 식민지였던 토지였고 유럽의 문명과 언어의 원천이었으며, 유럽문화의 호적수였고, 또 유럽인의 마음속에 가장 깊은 곳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타자 이미지이기도 했다”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서양이 가지는 동양에 대한 타자의 이미지를 지리적·문화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는 서양이 동양에 대해 가지는 구체적 성격을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이드의 다음의 오리엔탈리즘이란 정의를 보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을 침략하면서 조작된 동양에 관한 모든 편견, 관념, 담론, 가치, 이미지 등을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요컨대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이다.”
 
이런 오리엔탈리즘의 구체적 예를 유명한 유럽인 두 사람 크로머와 벨푸어의 언어에서 찾습니다. “동양인은 마치 (법정에서처럼) 재판을 받는 존재로 (교육과정에서처럼)학습되고 묘사되는 존재로, (학교나 감옥 에서처럼) 훈련받고 규율되는 존재로 또(동물도감에서처럼) 도해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요컨대 동양인은 어떤 경우에도 지배의 틀 속에 포함되며 그 틀에 따라 표상되는 존재이다.”
 
우리는 이런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구체적 모습을 영국의 이집트 외교관 크로머 그의 책 「현대 이집트」에서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동양인이나 아랍인은 우둔하고, 활력과 자발성이 없으며 정도에 지나친 아부와 음모, 교활, 동물학대를 일삼는다. 동양인은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둔감하고 의심이 많으며 모든 점에서 앵글로 색슨 인종의 명석함, 솔직함, 고상함과 대조적이다.”「오리엔탈리즘」을 한국으로 번역한 박홍규 교수는 “이 책은 1911년 일본어로 번역되어 한국 침략을 위한 일본의 참고 문헌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본 연구소는 서양이 동양에 대한 우월 및 지배사상이 비성경적이며 역사적으로도 얼마나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이런 잘못된 오리엔탈리즘이 한국에 오는 제 3세계 국가의 국민들에게 반복하지 않도록 건강한 견제와 비판 기능을 수행할 것입니다.

6. 본 연구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도울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이론과 실천으로 몸소 모범적으로 살아왔던 손봉호 고신대 석좌 교수는 특히 ‘난민’에 대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난민에 대해서 세상에서 가장 인색한 우리나라와 이에 대해서 아무 감각도 없는 한국교회.”라고 질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또 “만약 우리나라에 미국이나 영국처럼 노동자들과 난민들이 대거 몰려왔다면 아마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극렬하게 국수주의적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필자는 손봉호 교수의 지적이 많은 부분에 옳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필자는 고신대학교에서 세계화와 다문화 이해라는 과목을 강의하는 가운데 매학기 200명씩 수강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밀려오는 외국인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놀라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국제이주자와 다문화 이해를 위한 관심과 그들을 돕고자 하는 열망을 보면서 한국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지만 난민 및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도 곳곳에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본 연구소는 이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여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유로 고국을 떠난 난민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섬기겠습니다.
 
우리는 이 나그네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었던 것처럼 강도만난 그 사람들을 진실로 도와주는 사마리아인이 진정한 이웃인 것처럼 또한 “이웃이란 우리가 잘 아는 주위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니라.”(약2:26)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연구소가 되고자 합니다. 성경의 기록목적도 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한 실천적 목적을 가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7).
 
어거스틴에 의하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타인을 돕는 손, 가난한 자에게 달려가는 발, 불행을 보는 눈, 한숨과 슬픔을 듣는 귀를 가진 것이야 말고 사랑의 참모습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모든 이주민들에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7. 국제 이주자 및 외국인 근로자, 그들은 ‘노동력’이 아니라 ‘사람’으로 왔습니다. 여러 통계들이 2018년을 정점으로 대한민국의 인구는 인구절벽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저 출산, 고령화 및 젊은이의 3D 직종 기피로 이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한국사회가 외국인 근로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급속한 다문화 사회로 나아 갈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 가운데 혹자는 “다문화 사회, 득이냐 실이냐?”라는 실용적 질문을 제기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본 연구소는 이런 실용적 관점을 참고는 하되 인간을 단지 “효율”과 “기능”으로 보는 기능주의적 관점 등 어떤 비성경적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는 스위스의 소설가, 극작가 및 건축가인 막스 프리슈(Max Rudolf Frish, 1911-1991)의 지적처럼 “우리는 노동력을 불렀다. 그런데 사람들이 왔기 때문”입니다.
 
8. 본 연구소는 모든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우리의 것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동화 주의적 접근을 반대합니다. 동화 주의적 사고방식 근저에는 타자를 나와 같아야 하는 존재로 상정하는 동일성 논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유럽의 역사·예술사·인류학·철학·소통 이론들을 연구하며, 그 속에서 유럽이 낯선 이들을 어떻게 만나왔는지를 유형화한 독일의 선교학자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동일성 원리의 극단적 원형을 식민주의적 타자관 에서 찾습니다.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이 중남미 식민지 피지배인 들을 대하는 태도는 흔히 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을 가르치고 개화시켜 나처럼 인간이 되게 하든지 아니며, 인간이 아닌 사물로 분류하여, 사고 팔수 있는 노예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오직 A 만을 살아남게 하는 사회, A와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는 다양성 아닌 획일성이 지배하는 사회이며, 주류의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입니다. 일제 식민지 정책으로서, 일본식 성명 강요, 조선어 금지 신사참배 강요 등이 이러한 동일성 논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이런 동일성 논리의 잘못을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경험하고 그것을 저주했던 우리가 한국에 있는 외국인에게 우리가 당한 방식을 그대로 외국인들에게 적용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9. 본 연구소는 이런 동화 주의적 접근 대신에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문화 다양성을 꽃피우기 위해 동일성 논리에 입각한 사고방식을 청산하고 나와 다른 문화를 그것의 고유성 속에서 파악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인정할 것입니다. 유네스코도 ‘세계 문화 다양성 선언’ 뿐 아니라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협약’을 통해 “문화 다양성이 인류의 중요한 특성이며” “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본 연구소는 이러한 입장을 지지합니다.
 
10. 본 연구소의 무슬림에 대한 이해
국내 모 대학의 교수처럼 무슬림에 대한 실체와 다르게 옹호하는 입장도 배격하고 이슬람에 대한 실체와 다른 왜곡된 생각도 교정하고자 합니다. 이슬람에 대한 실체적 접근을 하고자 합니다. 이슬람에 대한 지나친 호교론적 접근 보다는 객관적인 실체에 대한 진리적 접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10.1. 최근 국내에서 다문화 선교 사역을 하는 선교사님이 저에게 보낸 문자에 “이슬람은 적그리스도이다.” “교회와 가정을 파괴시키는 사탄의 도구” 라는 내용이 왔습니다. 이와 유사한 입장의 학자도 있습니다. 그는「중동 짐승 (Mideast Beast)」이라는 책의 저자 조엘 리차드슨 입니다. 저자는 에스겔, 다니엘, 요한계시록을 토대로 성경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이슬람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토대로 이슬람이 적그리스도가 될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슬람국가(IS)의 출현과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발흥과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이 파급되고 있는 이때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이슬람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줍니다.
 
하지만 조엘 리차드슨의 입장과 대척점의 위치에 있는 책이 조나단 E. 컬버의 「이스마엘」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을 향한 선교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언급 가운데 부정적 언급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주장에 대해 구약학자 월트 브루거만은 그의 「창세기」주석에서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동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6장을 보면 아직 이스마엘이 하갈의 복중에 있을 때를 묘사하고 있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나서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 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16: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 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들으신다.’ 라는 의미를 가지며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하갈의 마음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녀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신다는 것을 항구적으로 상기시켜 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마엘 이 광야에서 갈증으로 죽어 갈 때에 창세기 21:17은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 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21:13).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21:18). 이런 축복을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와 함께 하시니.” (창21:20b). 이 어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 곧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다윗, 예레미야 등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구약학자 김의원 박사는 이 책이 기여하는 바는 “기독교인인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다시 읽어 보게 하고 이스마엘 을 향한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게 해준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으로 이스마엘 의 후손들 사이에 엄청난 규모의 영혼들을 추수하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슬람 지역인 이란, 파키스탄과 이집트 등에서 일어나는 내부자 운동으로 수많은 무슬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고 선교현장의 사역자들이 전하는 것에서 증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2.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에게는 오스만 투르크는 무시무시한 대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 대다수는 그 당시의 교황과 오스만 투르크를 “적그리스도”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칼빈의 저작을 볼 때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언급을 거의 발견할 수 가 없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그의 저작 「탁상담화」에서 ‘터키인들에 관하여’ 라는 장에서 오스만 투르크 이슬람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루터는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도 이슬람이 가지는 문화와 종교의 좋은 점을 긍정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루터는 이슬람의 행위에 의한 구원, 종교전쟁, 일부다처제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한편 이슬람 예배의 진지함, 이슬람 교사들의 엄격한 생활, 그들이 본 그대로의 진리에 대한 사랑, 터키 군의 엄격한 규율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슬람에 대한 태도도 루터와 같은 균형 있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3. 본 연구소는 무슬림의 유입으로 발생할 수 있는 다문화 사회의 위험성을 직시하지만 그들 가운데 “옥석”과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면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IS(Islamic State, 이슬람 국가)가 저지른 리비아 해안에서 21명의 콥트 교도들의 참수, 브뤼셀과 파리 테러는 천인공노할 행위입니다. 그것은 악마의 짓입니다. 그 사악함에 대해 우리는 치를 떨어야 하고 어떤 강력한 대응도 불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IS에 대한 생각과 분노 때문에 대다수의 선량한 외국인 유학생, 국제 결혼자 및 무슬림 외국인 근로자들을 IS와 같이 취급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더러운 물을 버리기 위해 목욕 물통 속에 있는 소중한 아이를 버리는 잘못과 같습니다.
 
제 수업을 듣는 대학원생 중 한명은 한국에 몰려오는 무슬림들이 마치 대한민국을 접수하러 오는 “침략군” 같이 여겨진다고 했습니다. IS의 만행과 이명박 정부의 수쿠크(Sukuk)법 통과 시도와 박근혜 정부의 익산의 할랄 식품단지 조성시도를 보면서 많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과 일반인들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사랑하여 방문하는 대다수의 선량한 외국인 유학생, 국제결혼 가족들과 근로자들도 있다는 것도 현실입니다. 따라서 본 연구소는 이러한 사실을 많은 국민들에게 알리고 그들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개선하고 관점을 변화시켜 성경적 가르침에 따라 그들을 “나그네” 와 “손님”으로 섬기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이 학술대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1. 본 국제학술대회는 유럽의 경우처럼 다문화 사회가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파괴적·혼돈적 측면을 간과하지 않되 다문화 사회가 가져다 줄 긍정적·창조적·역동적 측면도 보고자 합니다.
 
많은 문화 연구자들은 “한 사회 속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며 상생할 때, 그 사회는 엄청난 창조적 역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문화적 다양성은 그 사회의 문화적 자산을 풍부하게 해 줄 뿐더러 차이를 껴안고 함께 사는 것을 배우게 함으로써 사회를 성숙시키는 것으로 봅니다.”, “유네스코의 문화 다양성 선언에서도, “창조는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서 풍성해 진다고 봅니다.” 많은 학자들은 문화의 다양성을 “창의성과 발전의 원천‘으로 봅니다. 따라서 “각각의 문화전통은 창의성의 원천으로서 보존되어 후대에 전달되어야함”을 강조합니다.
 
유네스코의 내용 중 “문화 다양성은 발전을 위한 원천의 하나로서, 발전이란 단지 경제 성장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지적·감성적·윤리적·정신적으로 좀 더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영국의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L. Newbigin)은 다원주의를 문화적 다원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로 구분합니다. 우리는 종교적 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없지만 문화적 다원주의는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그에 의하면 문화적 다원주의는 “한 사회 안에 있는 다양한 문화와 생활 방식을 환영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이유는 문화적 다원주의는 우리의 삶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름의 평화’와 ‘차이의 공존’을 강조할 것입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 절반도 이민자라고 합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 총 11명 중 6명(물리학상 3명·경제학상 2명·화학상 1명)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미국 대학에 소속된 이민자 출신입니다. 1901-2015년 까지 미국인 노벨상 수상자의 31%는 미국이외 국가에서 태어난 이민자 출신이라고 합니다. 금년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인 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레이저 스토더트는 “미국이 지금 같은 최강국이 된 이유는 미국의 국경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답니다.
 
12. 본 연구소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불평등과 인권유린 같은 중요한 이슈에 대해 내부 고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이 이슈로 세계적 관심을 유발시킨 「막스 하벨라르 Max Havelaar」(1860) 소설을 참고할 것입니다.
 
이 작품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노예제 폐지에 끼친 영향에 비견될 만큼 그의 조국 네덜란드와 수많은 식민지 국가 정책에 많은 변화를 촉발시켰습니다. 「막스 하벨라르」는 많은 서평자 들에 의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중의 한권으로 언급됩니다. 정신분석학을 개척한 프로이트는 ‘10권의 책을 추천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주저 없이 이 책을 첫 번째로 올렸다고 합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소설가입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 지방관과 부이사관을 지냈으며, 대표작 「막스 하벨라르」는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내용은 본국의 식민지 통치의 기만성과 학정을 풍자하였으며, 그의 정열적 이상주의는 근대 네덜란드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본명은 데케르(Eduard Douwes Dekker) 필명은 물타툴리(Multatuli 많이 고생했다는 뜻의 라틴어)이며 암스테르담에서 출생했습니다. 18세 때 네덜란드 통치하의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자바 ·수마트라 ·셀레베스 등지의 지방관을 거쳐 1855년 자바의 레박 지구 부이사관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가혹한 식민지정책에 시달리는 원주민을 동정하여 상관과 충돌한 끝에 사직하고 1857년 귀국하였으며, 네덜란드 ·벨기에 · 독일 등의 각지를 방랑하면서 저작 ·강연 ·기부 등에서 얻은 수입으로 생활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막스 하벨라르 Max Havelaar」(1860)는 인도네시아 체류 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원주민에 대한 착취 ·억압의 생생한 정경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여 본국의 식민지 통치의 기만성과 학정을 풍자적으로 폭로하고 탄핵한 것으로, 그의 정열적 이상주의는 근대 네덜란드 문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책 한권으로 19세기 네덜란드의 정책을 흔든 필명이 물타툴리 (Multatuli)를 가진 데케르는 스스로 고생의 삶을 살면서 그 책을 통해서 네덜란드의 풍족한 삶 뒤에 식민지 인도네시아 민중의 피와 눈물이 있음을 폭로하고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오슬로 국립대 박노자 교수는 그를 “해적국가의 양심”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필명으로 유럽 전역에서 문명(文名)을 얻은 에두아르드 데커(Eduard Douwes Dekker)는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즐길 것을 두루 즐기고 규율적이면서도 편한 생활을 보내는 선량한 소시민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유럽의 가장 부르주아적 국가인 네덜란드 대다수 국민과는 달리 데커는 본인이 의식적으로 고생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강물에 빠진 개를 위해서 주저 없이 강에 뛰어내리고 극장에서 배우를 험담하는 지체 높은 부르주아 손님의 뺨을 갈기기도 하는 괴짜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책을 통해서 돈독한 신앙심과 빈틈없는 법질서, 합리적 사업정신을 자랑하는 네덜란드가 부유하게 된 것이 결코 근검절약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박노자 교수에 의하면 네덜란드 사회의 깨끗함과 조용함, 예절과 매너 뒤에는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착취를 당하는 식민지 인도네시아 민중의 피와 눈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르주아 사회의 자본축적 과정의 약탈성을 데커가 과감하게 누설한 것입니다. 데커는 어떻게 해서 네덜란드 식민지 착취 체제의 내부 고발자가 된 것일까.
 
유럽의 ‘모범 문명국’의 ‘모범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 그가 본 것은 소위 ‘강제재배 체제’아래서 강제 노동수용소의 죄수처럼 당국의 지시대로 특정 작물만 파종했다가 수확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런 구휼도 없이 그저 대량으로 굶어죽어야만 하는 원주민들과 ‘공식적’ 착취에다가 개인의 치부를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온갖 부정부패 가렴주구를 다 저지르고도 처벌되지 않는 네덜란드의 탐관오리들, 네덜란드 당국과의 유착 덕분에 살인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토착지주들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국고와 상인들의 주머니들을 해마다 살찌우는 인도네시아의 커피와 사탕에서는 말 그대로 피비린내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순진하게도 지역 관료들의 비리를 인도네시아 총독에게 고발했다가 결국 생트집 잡혀 정직·직위해제 처분을 몇 번씩 당해본 데커는 이 체제 안에서의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는 퇴직을 자청하고 유럽으로 돌아와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한 호텔에서 인도네시아에서의 식민지배 체제라는 살인기구를 폭로·단죄하는 소설의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 네덜란드 19세기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막스 하벨라르」였습니다.
 
그의 필명 ‘물타툴리(Multatuli)는 라틴어 이름 그대로, 혹자는 “모질었던 그의 삶을 빼닮았다.”고 합니다. 작품 때문에 조국으로부터 불온주의자로 찍혀 각국을 방랑하던 그는 1887년 2월 19일 67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불온주의자로 찍혀 직업을 얻지 못한 데커는 각국을 방랑하며 집필과 연설로 생계를 꾸리다 1887년 2월19일 67세로 가난하게 죽었지만 ‘해적국가의 양심’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혹자는「막스 하벨라르」를 “식민주의를 말살”한 작품으로 추앙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설로 평가합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명언을 기억합니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악, 범죄, 죄악만이 있다. 그것은 심장의 부재이다(There is only one evil, one crime, one sin: lack of heart).”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이 심장의 부재가 있는 곳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일깨우는 연구소가 되겠습니다.
 
13. 하나 된 세상을 꿈꿉니다.
본 연구소는 거스를 수 없는 다문화 시대에 다문화 가족과 한국인이 차별 없는 하나 된 세상 대한민국을 꿈꾸어 봅니다. 서구사회가 이루지 못한 하나 된 세상을 복음 안에서 이루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저력과 경험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의 경계를 뛰어 넘어 하나 되는 세상이 대한민국에서 성취되어 오만하고 콧대 높은 유럽에 역수출 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복음 안에서 선진화를 이루는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교회가 앞장 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선진화는 고아, 과부, 나그네와 장애인등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소외받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우리가 대변 해 줄 때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교회가 가장 앞장서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이 교회가 룻과 보아스의 다문화 가정의 결혼을 통해 사사시대의 칠흑과 같이 캄캄하고 어두운 시대에 빛처럼 밝은 가정을 이루는 모범을 보이는 것처럼 그런 가정을 만드는데 본 연구소와 교회가 협력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이방 나라의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유대 남자 보아스를 만나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수많은 외국인 여성들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신앙으로 룻이 신앙을 가지고 어머니의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것처럼 그들이 한국의 룻과 보아스와 같은 믿음의 가정이 될 수 있도록 저희 연구소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룻·보아스 프로젝트’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본 연구소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다문화 가정의 역할 모델로 캐나다 총리 트뤼도의 개혁을 참고하고자 합니다.

첫째,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오바마 프로젝트’입니다. 몇 해 전 매일경제신문에서 다문화 가정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서 오바마 프로젝트를 구상했습니다. 그 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본 연구소는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k Obama)는 국제 결혼한 다문화가정의 자녀였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미국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 가운데 출생했습니다.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그의 삶을 조명하는 가운데 미국 시사저널 뉴스위크지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흑인 아버지와 이혼 한 뒤 외롭고 힘들게 사는 가운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전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급식권(Food Stamp)으로 어린 시절을 영위했다고 합니다. 그의 고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남자와 재혼함으로 의붓아버지를 따라 이슬람 국가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인도네시아 여동생은 중국계 캐나다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오바마는 “우리 가족이 다 모이면 유엔 같을 것”이라 했습니다.
어머니가 또 이혼 한 뒤 오바마는 외조부모들이 살고 있는 하와이로 보내졌습니다. 거기서 그는 백인들의 인종차별 가운데 심지어 ‘깜둥이’라는 말도 여러 번 들으면서 상처 많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런 아픔과 상처 가운데 그는 마약도 손에 대기도 해서 한때 ‘문제아’로 낙인찍히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외할머니의 교육의 힘으로 오늘의 그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육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교육의 힘으로 다문화 가정 자녀 중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교육의 힘으로 오늘날 수많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을 교육기관, 중앙정부, 지방정부와 기업과 교회와 연대와 협력을 통해 그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연구소가 되고자 합니다.

둘째, 얼마 전 취임한 캐나다 트뤼도 총리는 내각 장관 30명중 절반인 15명을 여성으로 임명했고, 청년, 난민 또는 이민자, 원주민, 장애인 출신을 두루 기용했습니다. 그 중 난민과 이민자를 각료로 영입했습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발상입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이런 획기적 발상을 먼저 시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의 예입니다. 그의 탁월한 예지의 능력과 국가 경영능력을 인정함으로 그가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를 사용하였습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서 이스라엘 주변의 여러 국가들이 다양한 인재를 받아들이는 문호를 개방하는 장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애굽, 바벨론과 바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집트와 바벨론에서 국제적 인재로 쓰임 받은 요셉과 다니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은 남의 나라에 노예로 팔려왔지만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개방된 세상을 만드는데 본 연구소가 도움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규모가 전 세계에서 상위권에 해당되는 국가입니다. 세계에서 인구 5천 만 명 이상에 개인국민소득 2만 5천불이 넘는 국가가 미국·일본·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그리고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합니다. 한국은 자동차·선박·전자 등에서 세계최고의 기술력으로 인정받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미국·일본·독일에 이어 네 번째로 특허를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경제규모의 선진국만 아니라 다른 문화와 민족에 대해서도 배려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 수준에 이르는 품격 있는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의 위대성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개방성’에 두었습니다. 그 개방성 때문에 로마가 가장 위대한 제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더 강점이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과 장인정신에서는 뒤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타민족과 타문화에 대한 개방성에 있어서는 한국이 일본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개방성이 가장 잘 나타나야 하는 곳이 국제 이주자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태도입니다. 다문화 가정 문제를 다루는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정적 요소로 다문화 가정이 직면한 문제들을 우리가 소홀히 할 때 서구사회가 오늘날 직면한 문제들을 동일하게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브뤼셀 테러처럼 국내에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잘못될 경우 IS와 언제든지 연계될 수 있는 ‘자생적 늑대’들을 양산할 수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현재 피부색 편견, 빈곤과 교육 격차의 악순환으로 심각한 소외 계층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청년 연령에 도달해서 실업 및 그 동안 겪었던 인종 차별로 분노와 적개심 가운데 사회 불만이 고조될 경우 우리에게 걷잡을 수 없는 무서운 부메랑으로 우리에게 돌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 (Ulrich Beck)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가 그렇게 방치될 때 대한민국이 ‘위험 사회'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긍정적 측면으로 이들이 다양한 문화와 언어 그리고 인구 증가와 함께 가져다 줄 노동력은 한국여성의 출산율 저하로 치닫는 인구 감소와 노동력 부족을 해결 할 수 있고 나아가 다문화 가정의 부모 나라와 대한민국 그리고 국제사회의 가교역할을 담당하는 국제적 인재로 기여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국제이주자와 다문화 가정을 ‘그들’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데는 ‘2%’가 부족합니다. 이유는 레비스트로스의 나라 프랑스에서 최근 이런 철학에 기초한 다문화 정책을 포기하는 가운데 그들이 주장한 톨레랑스(Tolerance, 관용)의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톨레랑스는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화두(話頭)입니다. 모더니즘이 강조하는 보편성과 획일성 대신 포스트모더니즘이 강조하는 ‘다름’과 ‘차이’를 포괄하는 가장 매력적인 용어입니다. 이 사상에 기초한 것이 유럽의 다문화정책입니다. 몇 해 전 노르웨이 사건은 독일의 메르켈 총리, 영국의 캐머런 총리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다문화주의 정책 포기와 궤를 같이 하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이들의 ‘다문화주의 포기’ 발언은 1970년대 그것을 처음 도입한 호주와 캐나다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다문화주의 포기를 한국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국제이주자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톨레랑스 및 다문화정책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피상성은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다문화주의 포기는 그들이 주장하는 톨레랑스의 사상적 피상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이 피상성은 캐머런과 사르코지의 우파정권이 인권 보다는 국익 때문에 다문화주의를 포기하는 것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문화정책과 톨레랑스를 전유물로 삼고 있는 유럽 좌파는 우파의 다문화 정책 포기를 비판하지만 그것이 실천 없는 수사(修辭)에만 그친다면 그 피상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달 전 한국을 방문한 유럽의 학자와 함께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중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럽인들 ‘톨레랑스’라는 단어 너무 좋아한다. 하지만 ‘톨레랑스’를 그렇게 열심히 부르짖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결정적 순간에 가장 ‘톨레랑스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것을 들었습니다. 너무나 위선적입니다. 해결책은 진정성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국제이주자와 다문화가정이 겪는 어려움 중 가장 원초적인 것은 그들에 대한 내국인의 편견과 차별입니다. 국제다문화 사회연구소는 외국인과 “차별 없는 세상” “차별 없는 대한민국”을 꿈꿉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는 톨레랑스의 가치와 한계를 직시하면서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인간에 대한 진정성 있는 교육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교육과 실천에 앞장서는 연구소가 되겠습니다.
 
국제다문화 사회 연구소 소개
1. 시작 및 경과
국제 다문화 사회 연구소는 2015년 부산지역의 다문화 사역에 관심을 가진 몇 분의 기독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2월 1일 창립총회를 가지고 3월 24일에 국내 학술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는 11월 11일 금요일 오전 9:00-오후 6:00까지 고신대 손양원 홀(4강의동 4401호)에서 국제학술 대회를 개최합니다.
 
2. 구성
한국에 이주해 살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 국제결혼 가정 및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돕는 학술 중심의 국제 연구소입니다. 국외 및 국내 전국 75개 대학에 171 명의 각 영역의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외 학자 6명, 수도권에 약 50명의 교수 그 중 서울대 8명, 고려대 5명, 연세대 2명, 이화여대 2명, 한국외대 2명, 서강대 2명, 부산대 7명, 동아대 6명, 한동대 7명 호남지역 3명 기타지역의 교수님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문은 김형오 전국회의장,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정근두 목사, 허남식 전 부산시장, 신정택 전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현장과 다문화 사역의 현장에서 일하는 30여명의 사역자들과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본 연구소는 전문분야와 실무분야 중 약 200명의 인원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3. 협력사역
학문적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문화 청소년들을 위한 (사단법인) 다문화 청소년 협의회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청소년들 가운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젊은이들도 많지만 다문화 청소년들 가운데는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젊은이는 훨씬 더 많습니다. 또한 긍정적으로 본다면 그들이 앞으로 한국사회와 그들 어머니의 나라를 연결할 수 있는 국제적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이것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4. 저희 연구소는 정책적으로 건강한 성경적 다문화 가정을 세우는데 앞장서 나갈 것 입니다. 본 연구소는 “다문화 가정, 선교의 땅 끝”으로 생각합니다. 다문화 가정의 요셉 가정, 룻과 보아스와 같은 건강한 성경적 다문화 가정을 세우기 위해 성경적·신학적·선교적·실천적 노력들을 수행할 것입니다. 특히 다문화 시대에 직면한 한국사회와 교회가 다문화 선교사역을 위해 서로 돕고 협력할 것입니다. 교회, 전문가, 현장사역자 및 정책 기관을 함께 엮을 수 있는 겸손과 섬김의 협력체가 되고자 합니다.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연대와 협력의 고리 역할을 하겠습니다. 현대는 Network의 시대입니다. 첫째도 연대와 협력, 둘째도 연대와 협력, 셋째도 연대와 협력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전4:12).
 
4.1. 입법기관 즉 국회, 행정기관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교육과학 기술부, 법무부에 정책 제안 및 입안을 하고자 합니다.
 
4.2. 광역지자체인 부산광역시, 부산시 교육청, 경상남도, 김해, 울산, 양산시와 부산지역의 16개 구군에 속한 다문화 가족을 정책적으로 돕고자 합니다.
    
국제다문화사회 연구소 소장 고신대이병수 교수(010-6566-7176)
사무처장 송태운 (010-9686-2262)
홈페이지 http:iri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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