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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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전업 음악전도 보컬 그룹으로 시작한 늘노래가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문화전도를 위해 헌신해온 늘노래문화전도연구소장 유의신 목사(믿음찬교회)에게 지난 40년과 문화전도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Q. 늘노래문화전도연구소(이하 늘노래) 창립 40주년을 맞았습니다. 지금까지의 늘노래 역사와 현재의 사역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늘노래문화전도연구소는 사실 음악으로 전도하는 순회전도팀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되면서 시작된 사역입니다. 음악처럼 다양한 문화장르로 전도해야 한다는 연구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늘노래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음악전도 사역은 1976년 11월이었습니다. 사실 그전에 제가 1973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이사벨여고(그 당시) 교사로 복귀하면서 평신도 청년운동 ‘목견들’(1974)이라는 제자훈련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1976년 이사벨복음학원에서 무궁화관을 개관하면서 관장직을 맡았는데, 그것이 또 다른 사역의 시작이 됐습니다. 바로 ‘늘노래음악전도단’이었습니다. 제가 1971년 도미하기 전에 평신도 청소년사역자로 양정복음교회(현 양정중앙교회)에 섬길 때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노문환 형제를 만나면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을 다녀오고 노문환 형제는 군복무를 한 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재회하면서 제가 인도하고 있는 목견운동에 가담하게 됐고, 자연히 같이 일하던 동료 이광무 형제와 서영식 형제를 인도했습니다. 말씀 가운데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헌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음악으로 전도하는 전업팀(full time)으로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창단된 후 1978년 동래중앙교회(당시 신동혁 목사)와 동광교회(당시 김정광 목사) 그리고 부산진시장선교회 중심으로 부산노래선교회라는 후원단체를 창립하면서 첫 단원들의 헌신에 힘을 보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늘노래’라는 이름으로 통일하고 후원회와 선교단, 이원화된 조직으로 이어가면서 보내는 자들과 가는 자들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단체가 됐습니다. 1987년 5월에는 공식적으로 한 달 동안 69회의 집회를 기록하게 될 정도로 사역이 왕성해졌습니다. 
1995년 이사장 신동혁 목사님의 소천과 갑작스런 노문환 단장의 사임 후 고광삼 단장 중심으로 늘노래 I, 늘노래 II, 김영국 단장(2000-2003)팀 그리고 늘노래뉴젠(NewGen) 김일영 단장(2004-2007)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노래의 정신과 그 사역을 위해 지속적으로 후원하시는 손길들이 있어 기도하는 중에 음악으로 전도해온 노하우를 나누고 2008년 다양한 문화장르로 전도하는 늘노래문화전도연구소를 개소하면서 새로운 사역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34차에 걸쳐 격월로 문화전도 아카데미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1986년부터 정기간행물로 등록해 월보로 발행하는 소식지 ‘작은터 큰나라’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Q. 기독교문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부산에서 문화사역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사역을 하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과 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A. 먼저 불모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산은 제법 괜찮은 문화 도시입니다. 사실 한국전쟁으로 팔도의 문화와 일본 문화가 비빔밥처럼 한데 어우러져서 지금의 부산문화가 되었습니다. 어느 도시도 가지지 못하는 특유의 문화입니다. 가장 확실한 예로 ‘늘노래’가 여기서 탄생한 것입니다. 
기독문화라는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보수적인 분위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노래의 음악형태가 기존 교회문화와 일부 충돌이 있었기는 하지만 늘노래 음악은 교회의 예배음악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전도를 위한 음악을 하는 팀이기에 차별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역을 거절 당하기도하고 교회의 후원과 지지를 받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노래 사역은 한국교회를 위해 사심 없이 사역해 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체 부동산이나 동산을 가지거나 단체 자체를 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단원들이 흩어질 때입니다. 평생 생명 걸고 복음을 전하자고 뭉쳤지만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개인 사역자로 흩어질 때는 마음으로 많이 아플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흩어져 더 큰 사역들을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 됐습니다. 오히려 흩어지게 하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경기 침체와 불황으로 문화계 전반적으로 타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문화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현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시는지, 또 대안을 제시해주신다면. 
A. 문화이야기만 나오면 용어부터 신경이 쓰입니다. 기독문화냐 기독교문화냐. 쉽게 말하면 기독인 삶으로 드러내는 문화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산하는 문화라는 말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문화라는 용어로 통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삶이 종교라는 틀에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면 예수님을 교주로 하는 종교 중의 하나로 전락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다른 종교와 경쟁하며 교세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 비교하며 우월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문화라고 하면 스스로 모순에 빠지기가 쉬워집니다. 말하자면 경제에 함몰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현실가운데 전반적인 사회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 현상 속에서 함몰되기 보다는 초연하게 문화에 기름부음을 받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본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하위개념입니다. 자본을 포기하고도 얼마든지 기독문화는 왕성할 수 있습니다. 기독문화는 자본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지배 받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포함하여 기독문화는 돈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택하는 순발력을 가지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Q. 교회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A. 기독문화의 뿌리는 기독인이라고 할 때 기독인이 속한 지역교회가 베이스캠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역교회에서 양육하고 세운 기독문화사역자들을 세상에 파송한다는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해외선교사들을 지원하듯이 지원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 경험으로 보면 문화사역자들이 교회 밖에서 자생한 것 같이 교회와의 연계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독문화는 교회에서 만들어져서 세상에 내보내져 선한 영향력을 만들어 가는 유기적 관계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를 통해 교회는 세상을 만나고 세상은 문화를 통해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문화를 교회가 세워가야 하며 기독문화사역자는 교회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긴밀한 생명력이 살아있으면 돕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공생(共生)관계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Q. 최근 청소년 사역 단체 대표의 성 스캔들 등 한국교회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연일 발생하면서,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기독교문화를 주로 소비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문화사역이 더 위축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학원복음화에 앞장서신 다음세대 사역자로서 지금 시급한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기독문화도 사람이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최근 벌어지는 일말의 사건들은 이미 있어 왔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된다든지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바뀌거나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은 그대로 있는데 직무와 사명이 달라지는 것뿐이지요. 그러니까 본인도 그 점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높은 기준으로 그들을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왜 그 사역을 하는가입니다. 그동안 기독문화는 번영신학과 맞물려서 유명해지고 커지고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면 세칭 성공이라고 하는 잘못된 의식과 동기에 함몰돼 있습니다. 이 시대에 젊은이들은 예수님처럼 죽는 사람을 보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공하면 그 뒤를 따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 시대(마지막 때)에 더 험한 일을 겪게 되고 희귀하고 훼괴한 일들이 벌어질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모두가 가는 넒은 길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들 보다는 아무도 안 가려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이 결국 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게 되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야 하는 원리는 지금도 유효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공지상주의로 인기와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은 엄격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대로 예수 믿는 자라면 제대로 된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 하나님이 알아주는 사역자로 마지막에 평가 받게 될 것입니다. 

Q. 창립 40주년을 맞아 8월 1일부터 전도노래를 공모하고 있습니다. 전도노래 공모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최근 기독문화에서 사용하는 언어들 가운데 잘못 사용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찬양사역이라는 말입니다. 찬양은 찬양이지 사역은 아닙니다. 또 하나는 워십콘서트(worship concert)입니다. 예배를 공연하다니요. 웃기는 일입니다. 
한 가지만 더 부언 한다면 예배음악과 생활음악과를 구분해야 합니다. 물론 찬송가 공회에서 출판한 찬송가에도 100% 예배음악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찬송가에 있는 곡은 예배에서 사용하고 그 외의 노래는 안 된다고 하는 분도 있더군요. 
사실 늘노래는 생활음악(전도노래)을 해 왔습니다. 어떤 교회음악지도자는 우리나라 교회음악을 늘노래가 많이 망가뜨렸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교회가 분별을 못해서이지 늘노래 책임은 아니지요. 다시 말하지만 늘노래음악은 전도하기 위하여 만들어지고 편곡하고 연주하고 프로그램과 설교를 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음악전도가 다음세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애절함이 있어서 이런 공모를 하게 되었습니다.

Q. 전도노래 공모 외 창립 40주년 기념행사가 있다면 소개해주십시오.
A. 작년부터 부쩍 늘노래 노래에 관심을 보이며 그 당시 감동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아마도 인터넷과 SNS 등 연결되는 길이 많아져서 더 그런가봅니다. 자연히 늘노래 곡을 다시 듣고 싶어 하고 음원과 악보를 구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스스로 늘노래 키즈(Kids)라거나 늘노래 왕팬이라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작년에 이미 11월 7일(월)을 정하고 늘노래가 시작됐던 무궁화관에 예약했습니다.
이날 창단 멤버와 옛 단원들이 홈커밍으로 모이고 그때 그 노래를 목 놓아 부르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선호하는 곡이 무엇인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날 홈커밍데이에서는 탑5곡들을 부르고 관객과 단원들이 무대와 객석 구분 없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Q. 늘노래 향후 사역과 목사님의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늘노래가 음악을 통해 전도에 진력해왔기 때문에 다음세대에도 계속해서 음악전도팀이 전국에서 새롭게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이제는 교회가 전도팀을 만들어서 파송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양한 문화장르에서 기독문화에 헌신하는 분들이 자신의 문화영역을 가지고 복음전하는 청춘이 많이 나서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런 분들을 위하여 코칭과 지원해야겠다고 다짐을 해 봅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이번 기회에 다음세대에 좀 밟히자고 합니다. 디딤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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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40주년 ‘늘노래’ 이제 다음세대 디딤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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